엄마가 세상을 떠난 그 해 오월 솜틀집에서 일을 하다 짬이 나 솜틀집 마당에 놓여있던 나무 벤치에 앉아 책을 뒤적였다. 며칠 전 헌 책방에서 구한 "중1 국어 완전정복"이었다. 책은 앞에 몇 페이지에만 약간의 메모가 남아있을 뿐 깨끗한 책이었다.
컬러 겉표지 안쪽 목차 맞은편에 소월의 "산유화"가 있었다. 5월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초점 흐릿한 연초록 물푸레나무 이파리를 배경으로 시가 곱게 앉아 있었다.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슬픈 것도 같고, 마음이 꽉 차 버린 것 같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하루 종일 나를 채웠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산에 꽃이 피고 지듯이 사람도 그러하고, 모두 홀로 외로움 속에 피었다 사라지는 삶이었다. 어머니의 삶도 별반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돈니치, 그 이름과 같이 진흙 구덩이에 핀 달개비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엄마가 없어서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만 챙기면 되는 이 상황이 안심이 되었다. 금대교회 전도사님은 엄마 장례를 치를 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며 나를 비난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그 후에도 몇 해가 지나도 눈물이 난 적 없었다.
매일 솜을 틀고, 그 솜을 이불집이며 개인 집에 배달하는 일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솜이 무거운 물건은 아니어서, 보자기로 싼 솜을 짐 자전거에 가득 싣고 좁은 골목을 묘기 부리듯 누비고 다녔다. 엄마가 세상을 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솜들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엄마도 없는데 교회 뒤 창고에서 더 지낼 이유도 없었고, 때마침 사장님 아들이 서울에 있는 신학대로 진학을 해서 마루방이 비어 있었다.
마루방은 난방시설 없이 마루만 놓인 방이어서 겨울에 지내기는 불편했으나 봄부터 가을까지는 간이침대를 놓고 지낼만했다. 출퇴근이 필요 없고, 식사 또한 솜틀집 가족들과 함께하니 지내기에 걱정할 것이 별로 없어 좋았다.
금대교회 창고에서 지내는 동안 전도사님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리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내 봉급 한 달 분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솜틀집으로 거처를 옮길 때 전도사님이 빌렸던 돈을 없었던 것으로 해 달라며, 교회 창고에서 1년 넘게 공짜로 살았으니 헌금한 것으로 여기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시라고 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원주 중앙시장 인근에 원주신협이 건물 중 한 층을 내줘 중학교 과정 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다. 신협은 건물을 무료로 사용하게 허락해 주고, 교사는 대학생들이 무료로 봉사를 하는 곳이었다.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는데 국민학교 졸업증명서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4학년 1학기까지 다닌 것이 전부였고, 졸업증명이 없으면 모든 희망이 허사라고 생각되었다.
돌이켜 보면 민망하지만 일단 다니던 국민학교 교장선생님 앞으로 나름 비장한 편지를 보냈다. 교장선생님 전상서로 시작해서 내가 언제 입학해서 학교를 그만 든 때와 이유를 절절히 쓴 다음, 마지막으로 졸업증명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인생을 망치시는 것이니 책임지시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학교에서 답장이 왔다. 걱정하지 말고 발급비용과 서류를 보낼 우표를 함께 보내면 졸업증명을 보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솜틀집에서 편지를 열어보고 야~ 소리를 크게 질렀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솜틀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많은 상황이 달라졌다. 뭐랄까.. 나에게 울타리가 생긴 느낌, 안도감과 함께 구속을 받는 것 같은 갑갑함도 생겼다. 고향을 떠난 다음부터 믿을만한 어른을 만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굶주린 짐승이 병들고 약한 먹잇감을 노리듯 내 주변에 어른들은 대부분 모질고 악랄했다.
반면 솜틀집 사람들은 따듯했고 믿을 수 있었다. 난 고분고분한 놈이 아니었다. 혼자 좌충우돌하며 살다 보니 버릇없고 의심 많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뒤틀려 있었다. 그런 나를 받아주고 사람대접해 준 곳이 솜틀집 가족이었다.
솜틀집 사장님께 하루 쉬겠다 하고 고향을 갔다. 누나가 죽은 후, 아니 엄마와 원주로 온 후 고향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졸업증명이야 우편으로 보내달라 해도 될 일이었지만 고향에 한 번 가보고 싶었고, 누나가 죽은 후 조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예미역에서 기차를 내려 고향 돈니치를 향해 걸었다. 삼십 리 길 말구렁재를 넘어갔다. 예전에 엄마가 밀가루 두 포대씩 머리에 이고 넘나들던 고개였다.
매형은 사남매를 할머니에게 떠넘기고 외지로 나가고 없었다. 늙고 병약한 어른 혼자 남매들을 챙기기에 버거운지 조카들은 한눈에 봐도 보살피는 손길이 부족했다.
막내 정희는 어느새 일곱 살이었고, 그 어린것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한다고 꼬물거리고 있었다. 내가 정희야 부르니 쳐다보는데 낯설어했다. 내가 니 외삼촌이야 하니 배시시 웃는데 불쌍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정희를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밥 먹는 입을 던다고 어린 정희를 남의 집에 보냈는데, 조카들이 철이 든 후 그 집을 찾아가니 정희가 가출한 후 연락이 끊겼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