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말하는 덕후다. 장르 불문하고 한 번 쯤은 발을 담가본 잡다한 덕후, 줄여서 잡덕이다. 시중에 없는 물건은 직접 도안을 제작하여 물건을 만들기도 하고,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은 해외 직구까지 감행해보기도 했다. 수많은 영화,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등을 보며 익힌 얄팍한 외국어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좋아하는 뮤지컬을 볼 때마다, 커튼콜 촬영이 가능하면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들고 가 촬영을 하고, 또 보정을 해서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은 따로 포토샵으로 보정을 한 뒤 엽서와 스티커로 뽑아 다이어리를 꾸밀 때 사용하기도 했다.
자급자족 제작이 익숙한 내게 두리의 등장은 새로운 가족인 동시에 새로운 덕질 대상이었다. 사진 촬영, 편집은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들도 두리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두리의 귀여움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두리의 사진도 잔뜩 인화할 생각에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리의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졌다. 동글동글하고 오동통한 우리 강아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모습을 간단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애플 펜슬을 충전하고 아이패드로 그림을 끄적끄적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린 두리 캐릭터 꼬리! 움직인다! 프로펠러! 아주 단순하게 슥슥 그렸지만, 두리를 꽤 닮은 캐릭터가 태어났다. 털이 복슬복슬해 입이 가려지고, 축 처진 동그란 귀와 몸에 비해 긴 꼬리, 통통한 몸통으로 구성했다. 가족들도 귀엽다며 좋아했고, 아빠는 아예 핸드폰의 잠금화면으로 설정해두셨다. 딸이 그린 막내아들 그림이라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다가오는 가족들과 맞이할 두리의 첫 생일, 좀 더 특별하게 축하하고 싶다...!
두리 전용 케이크 제작은 물론이며, 사람 가족들이 먹을 케이크도 좀 더 귀엽고 특별하게 제작하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다 주문제작 케이크를 알아보게 되었다. 귀여운 두리의 모습이 담겨서 더욱 특별하고 사랑스럽게 준비하는 것이다. 저런 캐릭터 정도라면 케이크 디자인에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강아지 전용 케이크는 입소문이 자자한 곳에 주문제작을 따로 넣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리의 사진을 보내면, 베이커리 측에서 두리의 얼굴을 본따 캐릭터를 그려주는 시스템이었다. 강아지 케이크의 경우에는 재료 부분에 있어서 전문가에게 아예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강아지 케이크는 고구마, 단호박, 닭가슴살 등 강아지의 기호에 맞춰 제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배송이 와서 확인해보니, 귀여운 모양의 떡 같은 느낌이었다.
두리 전용 케이크에 참고한 사진. 사실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자기도 먹겠다고 애교 부리는 모습이었다.
두리의 상징 컬러는 연두색이라고 생각했다. 업체에서도 다행히 연두색이 가능해 두리의 얼굴을 쏙 빼닮은 캐릭터를 그려주셨다. 흰색의 두리 캐릭터가 헤헤 웃는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두리도 자기만의 케이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는데도 거부감 없이 매우 잘 먹었다. 처음에만 전체 모양으로 호기심을 갖게 내려줬고, 급여량에 맞게 케이크를 다시 잘라서 몇 번에 나눠서 먹었다.
그리고 두리는 자기만의 전용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이제 사람 가족들이 먹을 케이크를 준비해야 했다. 편하게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구매할 수도 있었지만, 역시 처음 같이 맞이하는 생일이니까, 가족들도 특별한 케이크를 먹어봤으면 했다. 마침 이전부터 주문해보고 싶었던 주문제작 케이크가 있어서 제작을 요청하게 되었다.
주문 제작 케이크는 주문자가 먼저 가벼운 도안과 디자인을 문의하고, 업체와 세부적으로 조정한 뒤에 제작을 완료하는 시스템이었다. 너무 까다로운 디자인은 제작이 거절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두리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가 잔뜩 담긴 디자인이 필요했다. 가족들도 별다른 반대 없이 내 의사를 존중하여, 우리가 먹을 케이크는 내가 디자인과 주문까지 하게 되었다.
두리 케이크 도안
그렇게 해서 나는 두리 생일을 위한 케이크 도안을 직접 그리게 되었다. 연두색이 잘 어울리는 우리 두리의 이미지를 살리는 것이다. 바탕은 최대한 밝은 느낌의 연두색을 깔아 메로나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을 원했다. 그리고 이제 막 한 살이 되었으니, 두리의 머리에 생일 고깔모자도 그려봤다. 두리는 평소에도 옷을 입기 싫어하기 때문에 고깔모자 같은 것도 당연히 쓰기 어려웠다. 준비해도 못쓸 것이 분명하니, 케이크에서라도 써보길 바랬다.
보통 성견의 기준을 만 한 살로 정한다고는 하지만, 두리는 아직도 어리고 우리 가족 눈에는 언제나 아기 같을 것이다. 그래서 아기 같은 새싹의 이미지를 원해 풀잎의 그림도 넣었다. "HAPPY DOORI DAY"라는 글씨는 구현 가능한 선에서 예쁜 색상을 넣고 싶어서 임의로 검은색으로 작성했다.
너무 복잡하면 주문이 안 될까 봐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귀여운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다. 다행히 주문을 넣은 업체에서는 제작이 가능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케이크를 수령할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물이 훨씬 귀여웠던 두리 케이크!
너무나 깜찍하면서 귀엽고, 게다가 맛있는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풀잎은 더욱 풍성하고 꽉 찬 느낌으로 그려졌고, "HAPPY DOORI DAY"라는 글자도 귀여운 핑크색으로 완성되었다. 케이크를 픽업하러 간 날, 처음 보자마자 너무 귀엽고 내가 원하던 모습대로 나와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두리를 안으로 데리고 올 수는 없어서 아빠께서 두리를 안은 채로 밖에 게셨는데, 제과점 사장님도 두리를 보고는 너무 귀엽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 강아지 정말 귀엽죠!!
케이크를 본 가족들은 케이크가 너무 귀여워서 먹기 아깝다고 했다. 처음에는 두리 얼굴만 남기고 옆부분만 발굴하듯이 덜어 먹었고, 마지막까지도 밑부분 빵만 야금야금 파내면서 두리 캐릭터의 얼굴을 사수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두리는 가족들이 먹는 것을 꼭 탐냈겠지만, 자기만의 전용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연두색 케이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내가 기획한 두리의 생일 이벤트가 두리도, 가족들도 모두 만족스럽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