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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제로 Dec 13. 2022

현대판 죄와 벌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재벌인

HBO 오리지널 <석세션> 리뷰

오래 전 이야기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열 살 때의 일인데요, 열 살짜리에게는 인생 최대의 고난이 학습지 풀기였습니다. 매주 선생님이 와서 검사하는 학습지는 꾸역꾸역 풀지만 선생님이 없는 학습지는 도대체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겁니다. 손도 안 댄 학습지 풀기가 너무너무 싫어서 고민 끝에 그중 한 권을 아파트 쓰레기통에 버린 적이 있습니다. 


버리고 나면 속이 시원하리라 생각했는데, 저는 저 자신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그 즈음 도서관에서 <죄와 벌>을 빌려 읽었는데, 라스콜니코프의 심정이 정말 쏙쏙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저는 학습지를 쓰레기통에 버린 것인데 어떻게 그 정도로 공감이 되냐 싶겠지만, 실은 저희 부모님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습지를 버렸다는 사실 자체로 죄책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들킬까봐 겁먹었던 것이죠.


저는 관리인 아저씨를 붙들고 아파트 쓰레기통에 버린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열 살의 저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아저씨들이 실수로 내 학습지를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그 떨어진 학습지가 강물에 빠져서, 사람들이 강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 큰일이라는 내용의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손발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괴로워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제가 다른 사람을 해코지한 것도 아니고 누굴 괴롭힌 것도 아니고, 학습지 한 권이 너무 풀기 싫어서 그걸 쓰레기통에 버린 것인데 정말 너무했다 싶지요. 더구나 제가 버린 학습지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이 뉴스에 나온다는 것을 상상하는 부분은, 상담심리학과 교안에 케이스로 등장해도 될 만합니다. 도대체 부모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이었길래 아이가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요...


로건 로이,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조선일보 사장 정도 된다.

이 로건 로이도 참 어지간한 아버지입니다. 일단 극중에서 설명된 것만 주워서 꿰어도, 우선 어린애를 때리면서 키웠습니다. 그 애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때립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이 약속을 안 지킵니다. 자기 기분대로 자식의 인생을 막 뒤집어 버립니다. 최악인 것은 실적을 내지 않으면 자식을 사람 취급 안 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약점을 보이면 그것을 카드로 이용합니다.


켄달 로이. 조선일보 사장 아들 정도 된다.


사람이 이런 부모 밑에서 올바로 성장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그의 자녀 넷에게는 각각 전부 문제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과대망상, 둘째아들은 약물 사용 장애, 셋째아들은 성 기능 장애, 그리고 외동딸인 쇼반 로이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애착 형성에 장애가 있어 보입니다. 전문가를 불러서 이 남매에 대한 진단을 부탁하면 분명 성격장애며 기분장애 같은 것이 줄줄이 나올 것입니다. 이중 가장 대놓고 환자로 나오는 존재는 켄달 로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드라마의 메인 캐릭터라고 할 만한 자입니다. 노래도 두 곡이나 부르는데 OST를 들어보면 정말 웃기고 괴롭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원칙이므로 가능한 피해서 말하면, 켄달 로이는 흥청망청 다니다가 사고를 하나 칩니다. 꽤 중대한 사고입니다. 아마 같은 사고를 로건 로이나 쇼반 로이가 쳤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인데(보신 분들-그렇게 짐작되지 않던가요?), 켄달 로이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로건 로이는 아들이 이 죄책감을 건강하게 소화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켄달이 로이 가문에 먹칠을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니까 사건을 은폐해 버립니다. 그래서 켄달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사랑했다가(수습해줘서 고마워요!) 나중에는 증오하게 되어 버립니다(악마! 어떻게 그런 죄를 지은 나를!!).


켄달의 죄책감은 의외로 시즌들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저는 켄달이 약간 괴로워하다가 말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시즌 3 에피소드 9에서도 켄달은 엉엉 웁니다. 이 드라마가 실은 폭스 사 이야기라는 둥, 현실의 누구를 반영한 것이라는 둥 하는 점에 이끌려서 보기 시작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냥 <죄와 벌>이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돈이 없어서 전당포의 노파를 죽였는데, 켄달은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사고를 쳤다는 점이 다르지만요. 게다가 아버지 로건 로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달을 너무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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