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 두 아들을 위한 변론
어릴 때는 대부분의 어린애들이 그렇듯이 저도 동네의 욕쟁이 할머니를 굉장히 무서워했습니다. 지금은 아마 세상을 떠나셨을 그 여성 노인은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오가는 골목에 면한 집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지나다니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소리를 지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 조금 익숙해졌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길게 대화한 환자는 양극성장애로 진단받은 여성이었습니다. 저는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배운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낯선 곳에 와 계시니 주무시기 불편하지 않으냐,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냐는 질문을 던져서 결국 그가 다니는 병원과 주치의 이름까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남성과도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가족과 이웃을 위협하던 심각한 상태였지만, 약물로 어느 정도 조절되고 있는 상태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그는 저와의 의사 소통에 더듬더듬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겁을 먹고 예, 아니오, 괜찮아요 정도의 말을 겨우겨우 내놓을 정도였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한창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도중, 갑자기 남성의 부모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원망하고 채근하는 어머니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그의 언어는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대화도 끝이 났습니다.
일련의 경험 이후로, 저에게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환자와 대화를 잘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닥터 두리들이 동물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여 그들을 돕는 것처럼, 나도 정신증 환자들의 망가진 언어를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임상심리를 전공한 친구에게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뒤, 제가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정신을 차렸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의학의 목표는 그 사람이 우리처럼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지,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게 아니야."
고백하건대, 제가 론 파워스의 책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를 고른 동기도 상당히 불순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관음하고자 했던 것이죠. 제가 조현병 환자들의 와해된 언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번역을 거쳤을지라도)론 파워스의 아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중언부언을 늘어놓았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가 아들을 소재로 '불행 포르노'를 제작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어겼을 리 없습니다. 작가는 환자의 부모가 겪은 슬픔과 이 사회가 정신질환자를 대하는 부당한 방식을 종과 횡으로 엮듯이 내놓습니다.
다만 론 파워스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업무상중과실치상으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 대해 읽을 때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가 쓴 서평에 '두 아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표현이 앞섰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물론 론 파워스가 딘이 수감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도소와 구치소에 수용 중인 많은 사람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교도소와 구치소에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들이 수용되어야 할 곳은 올바른 시설을 갖춘 병원이죠. 론 파워스에 따르면, 이들이 삽화 상태에서 하는 일련의 행동을 '범죄'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론의 바람대로 환자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고, 그들이 복용하는 약물의 안전성이 제대로 연구되는 등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의 원래 제목대로, 아무도 미친 사람에 대해 신경쓰지 않습니다(No One Cares About Crazy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