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알았어야 할 일>
요즘 영어 공부를 새로 하고 있습니다. 내 나라 말을 할 때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던 개념들도 제2언어를 공부할 때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시제와 가정법파트를 가장 좋아합니다. 영문법을 처음 배우던 중학생 시절, '~했어야 했는데!'라는 표현은 괄호 속에 (그러지 않았다)를 숨기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속으로 감탄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정법 과거(현재사실의 반대)를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고도 결심했습니다.
유통사가 올려놓은 홍보 문구 중 워싱턴포스트가 이 책을 올해의 최고 스릴러 5선에 선정했다는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 그 '올해'가 2020년을 뜻할 리 없기 때문에 영문판 발행 년도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You should have known>이 원래의 제목이고, 2014년에 출간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문판 제목을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You should have known, 넌 알았어야 했는데(그러지 못했어)!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의 주인공은 상담심리사입니다. 최근에 배우자 잘 고르는 법과 관련된 책을 한 권 써서 초안이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잘 나가지만 이 책만 잘 팔리면 앞으로는 승승장구 더 잘 나갈 것 같습니다. 주인공에게는 바이올린 잘 켜는 예쁜 아들도 하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숨진 채 발견됩니다.
시체가 나왔으니까 워싱턴포스트는 이 책을 스릴러로 분류한 모양인데, 사실 전형적인 스릴러 범주에 <진작>을 집어넣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반전이라고 할 만한 요소는 소설의 중반부에(즉 너무 일찍) 등장하며, 그 단서는 1/4 지점쯤에 등장합니다(그런데 단서가 너무 무책임합니다). 눈치가 있는 독자는 <진작>의 주인공이 쓴 책 속의 책 내용이 무엇인지만 가지고도(첫 챕터에 다 나옵니다) 단서와 반전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너무 쉽다'고도 불평하더라고요.
그러나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은 그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저는 범인이 등장한 이후로 주인공의 서사는 소설 속에서 흘러가게 내버려 둔 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의 책 속 작품, 주인공이 썼다는 그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형법의 '책임론'에 이 책 제목과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행위자가 합법(合法)을 결의하여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결의하고 위법하게 행위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위법성의 인식 비난이 가하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선택을 하리라 결심하고 행위하였으므로 '너는 이것이 나쁜 선택인 것을 (진작에)알고도 일부러 그랬잖아?'라는 비난이 가해지는 것이 형법상 책임의 핵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진작 알 수 있었던 일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한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려면, 역시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