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용기를 낸다. 하루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것. 어제의 사실이 오늘의 사실로 이어지지 않는 시대. 시대의 수상한 흐름을 감당해야 하는 중년의 책을 만드는 남자는 매일 아침이 두렵다.
경험으로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다. 경험이 먹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경험이 짐이 된다. 경험을 내세우면 밉상이 된다. 경험을 내세우던 나이 든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며 살아왔는데, 이제 내가 간신히 경험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의 선택은 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나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 우리의 신문은 ‘생각’이 없다. 두 개로 나뉘어 자기 목소리만 내는 정치의 이편과 저편에 서 있을 뿐이다. 정치는 그렇다 치자. 당리당략. 정치의 원리다. 그러나 언론은 그래서는 안 된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팩트에 충실해야 한다. 객관적인 해설, 그 이상의 주장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선동이다.
우리 언론은 어떤가.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입맛에 맞는 뉴스를 받아쓰기한다. 《뉴욕타임스》가 6개월 동안 354명(내부 인원 228명, 외부 인원 126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를 내놓은 게 2014년 5월 15일이다. 2021년의 절반을 지운 지금, 우리 언론 중 어느 곳이 그러한 보고서를 연구하고 준비하고 내놓았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신문을 읽을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뉴스도 최소화한다. 지난 밤 뉴스를 재탕 삼탕 반복하는 아침 뉴스를 시청하지 않는다. 저녁에 운동하며 그날 새롭게 들어온 뉴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마저도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키는 선정적인 아이템이 반복되면 채널을 돌린다.
신문과 방송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 기저에는 ‘정보’가 있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멀리하거나 끊는다는 것은 정보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를 멀리하면 불편하다. 정보가 데이터가 되고 그것이 모여 빅데이터가 되는 시대에 불편을 자처하는 일이다. 불편은 곧 손해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살아가며 얻는 정보가 그렇게 새로운 것일까.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보가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나에게 좋은 정보란 나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게 된다. 혜민 스님이 옳다(그는 정말 멈췄으니까!). 멈춤은 생각을 작동시킨다. 생각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게 한다. 생각의 힘이다. 생각하려면 정보를 최소화해야 한다. 최소한으로 받아들일 때 생각의 지평은 그만큼 넓어진다.
생각하는 사람은 정보를 읽는다. 정보 속의 옳고 그름을 파악한다. 다수의 반응에 동조하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지바 마사야가 『공부의 철학』에서 적었듯이 우리가 깊게 공부하는 이유는 환경의 동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정보의 철학이 아니라 공부의 철학이다. 정보를 공부하는 사람이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지바 마사야는 깊은 공부, 즉 래디컬 러닝이란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 편중적 인간이란 무엇일까. 어떤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행위하려고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조작하려는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완구)’을 다루듯 언어를 조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해 정보를 취사선택한다고 여긴다.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정보는 환경이 우리에게 이것을 지시하고 저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환경은 우리에게 절대로 크리에이티브한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해진 매뉴얼에 순응하길 원할 뿐이다. 이유는 하나. 생산성 때문이다. 누군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면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정보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내놓는 답변은 안이하기 마련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무심코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에 반응하는 절대다수의 의견을 살피고 그 결과에 동조하는 삶을 거부해야 한다. 슬프다. 정보의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하는 시대라는 게, 진정한 생각을 갖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