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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희 북노마드 Nov 18. 2021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나요?

돈 돈 돈…… 온통 돈 얘기뿐이다.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 대통령의 지지율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용을 쓰는 정치인들의 선호도도 철저히 돈이 기준이다. 내 돈을 불려주겠다는 사람, 내 돈을 지켜주겠다는 사람 앞으로 우르르 줄을 선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나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는 정치인은 아웃! 지금-여기 대한민국이다. 


앞으로 ‘돈’의 흐름은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돈이 천하의 근본[天下之大本]으로 군림할까. 아닐 것이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된 기후 위기, 지구의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덮친 코로나19처럼 우리가 신앙처럼 여겨온 자본주의 신화는 지구와 자연에 의해 금이 가고 있다. 더딜지라도 우리가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사회주의 요소가 현실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는 ‘성장’을 추구한다. 성장……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다. 뭘 자꾸 성장하라고 하는지, 왜 자꾸 성장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자기계발서식 성장을 부르짖는 사람을 나는 멀리한다. 조금씩 조금씩, 표 나지 않게, 슬금슬금. 나는 단언한다. 앞으로 성장은 진부한 단어가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에 지친 사람들이 점점 ‘탈성장’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말이다.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사이토 고헤이(오사카시립대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탈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전위적 학자다. 마르크스라니……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환경과 생태를 들먹이며 어물쩍 넘어가는 현실에서 그의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는 가히 혁명적이다. 책의 핵심은 ‘탈성장 코뮤니즘’이다. 풀어서 쓰면 ‘자본주의 체제를 없애야 탈성장이 가능하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일본에서 40만 부 넘게 팔렸다는 소식은 ‘입’으로만 일본을 '하대'하는 우리의 현실을 확인시켜준다. 마르크스, 자본론, 코뮤니즘이 들어간 책을 소비하고 소화하는 저들의 토대를 어떻게 폄하할 수 있을까.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무엇일까. '1.5도'라는 용어가 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2100년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하여 1.5도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선진국을 비롯하여 지구촌이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반 가까이 줄이고, 2050년까지는 아예 0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 정도로 보편화된 용어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성장을 동력 삼아 자본주의를 변형시켜온 선진국들의 겉과 속은 다른 것 같다. 일명 ‘녹색 성장’이라는 잔머리가 눈에 거슬린다. ‘기후 케인스주의’라고도 불리는 녹색 성장은 재생에너지에 대규모 투자를 해서 성장과 기후 위기 극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자는 주의다.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 반대편에 탈성장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경제성장과 기후 위기 극복은 양립할 수 없다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3퍼센트로 유지하면서 ‘1.5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0퍼센트 줄여야 한다고 ‘숫자’로 반박한다. 환경을 지키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경제 규모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사이토 고헤이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자본주의를 견제하고 대안을 내놓는 것만으로는 ‘탈성장’의 가치를 지킬 수 없다며 탈성장주의자에게도 대립각을 세운다.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는 한 탈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오늘날의 탈성장 담론은 실현 불가능한 공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건 그의 전위적인 주장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초)부유층 자산이 비현실적으로 급증하며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 탈성장을 하면 빈부격차가 확대될 거라는 고헤이의 주장에 묵직한 무제가 실렸음은 물론이다. 


‘탈성장’의 허구를 증언하는 고헤이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에코백과 텀블러를 쓰고, 음식을 남기지 않는 개인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고헤이는 “환경을 위한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고, 지구의 미래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를 발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다소 과격할 수 있는 고헤이의 제안은 팬데믹이라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면서 내일을 위한 오늘의 필수명제가 되었다. 정치가와 기업이 내세운 환경 대책이 실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이를 방치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고헤이의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인류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한 채 탈성장을 추구하면 격차만 확대될 뿐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이제 갓 싹을 틔운 ‘공유(share)’의 가치가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커먼(common, 공공재)’의 사고방식이 평범한 가치가 될 것이다. 어느새 사람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코뮤니즘’이라는 단어가 회자될 것이다. 알고 있다. 공유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코뮤니즘 앞에서는 떨떠름해하는 당신을. 걱정 마시라. 고헤이는 책에 친절하게 적어놓았다. ‘탈성장 코뮤니즘’은 중국이나 소련과 완전히 다르다고,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경제 성장주의에 빠지지 않고 지금 있는 ‘부’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돈 워리!


흥미로운 건 코뮤니즘, 즉 좌파적 삶의 양식이 구세대에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점점 우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세대 갈등이다. 어느덧 70대가 된 일본의 구세대는 일명 ‘단카이' 세대로 불린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우에노 지즈코와 우치다 다쓰루 같은 세대는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려운 만큼 점진적으로 쇠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취업이 어려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에게 단카이 세대의 탈성장론은 한가한 소리에 지나지 않다. 고도 경제 성장기와 거품 경제 덕분에 평생을 넉넉하게 살아온 그들이 이제 와서 젊은 세대를 격려한다는 미명 아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분노한다. 1980년대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86세대'에 대한 ‘MZ세대'의 반감이 커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1987년에 태어난 고헤이는 단카이 세대를 불신하는 1970~1982년에 태어난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보다 그아래 세대다. 그가 조금 특별한 걸까. 아니면 일본의 MZ세대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일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의 젊은 세대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상당수 나라에서 노동시간 단축, 돌봄 노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용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팬데믹을 심하게 겪고, 부실한 위기관리 능력에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을 극복하겠다고 도쿄올림픽을 강행했던 정부를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알다시피 코로나19는 특정 나라와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요사이 회자되는 ‘인류세’라는 단어처럼 지구촌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인류세란 지질학에서 인류의 경제 활동이 지구 전체를 뒤덮은 시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대미문의 팬데믹과 앞으로 닥칠 기후위기는 지구를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고 혹사시킨 결과다. 생명체인 인간은 움직이면 반드시 멈춰야 할 때가 온다. 오솔길을 걷든지 자전거를 타든지 산을 오르든지 강을 헤엄치든지 전력으로 달리든지 언젠가 숨을 고르고 쉬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지구도 마찬가지 아닐까. 팬데믹은 우리가 혹사시킨 지구가 쉬고 싶다고, 쉬어야 할 때라고 신호를 발신하는, 아니 경고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것은 성장을 멈추지 않겠다는 인류의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부를 성장시켰을지는 몰라도 그 욕망의 밀도 만큼 기후와 환경은 신음하고 있다. 개인의 욕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세상. 돈을 벌고 늘리는 것을 당연시하고 심지어 예찬하는 세상을 인류 전체가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참고로 고헤이의 명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의 원 제목은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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