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스라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
요즘 들어 자주 나도 모르게 한화 이글스의 ‘행복송’을 흥얼거리고 있다. 내가 프로야구에 입문한 지 올해로 꼭 10년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관심도 소질도 없었다. 내가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를 관람하는 일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글로벌 이벤트가 있을 때나 잠깐 관심을 갖는 정도였고, 그것도 스포츠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조건 한국팀이 외국팀에게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열의였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늘그막에 한화이글스를 애증 하는 보살팬이 되고 말았다. 10년 전쯤 남편이 갑자기 프로야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고, 당시 우리 집에 TV가 한 대밖에 없었던 탓에 나도 남편 옆에 앉아 야구라는 경기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저 건성으로 보기에 야구는 경기 시간이 너무 길었다. 공을 던지고 때리고 그라운드를 달려 홈까지 들어오는 공놀이였지만, 경기 규칙을 제대로 몰랐던 나에게 야구는 뭔가 꽤 복잡해 보이는 스포츠였다. 남편에게 물어 경기 규칙과 야구 용어를 하나씩 배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0개 구단 중 최약팀인 한화이글스의 팬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승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야구가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강한 승부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을 뻔했다.
나는 대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했으며 친정과 시댁이 모두 대전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한화팬이 된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문제는 한화의 성적이었다. 2015년 이후 한화는 2018년 3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다. 최하위 10위가 3번, 9위가 3번, 6,7,8위가 각각 한 번씩이었다. 한화의 성적이 갈수록 가관이어서 그랬는지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에 흥미를 잃었지만 나는 TV 리모컨을 사수했다. 그리고 투수의 일구 일구, 타자의 한 타석 한 타석에 긴장하고 열광하고 분노했다. 한화 투수가 볼넷을 내주거나 타자가 삼진을 당하면 대차게 험한 말을 발사하고, 한화 타자가 홈런을 날리거나 적시타를 치면 광분해서 남편을 놀라게 했다. 처음엔 나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던 남편도 이제 그러려니 한다. 스스로 선천적 열정결핍증이라고 늘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도 매일 저녁 승부욕에 불타는 내 모습은 낯설었다. 한화의 승률이 평균 4할 언저리였으므로 한 주일에 평균 3 ~ 4번은 한화가 경기에서 패했다. 그래서 지난 십 년 간 한 주에 절반 이상 나의 저녁 시간은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나 하는 좌절감, 실망, 그리고 분노로 점철되었다. 한화가 경기에 진 날은 남편과 아들에게도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나의 유치한 행태를 보다 못한 아들은 내게 팀세탁을 제안했다.
“엄마, 한화가 엄마한테 뭘 해준다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충성을 해요? 어차피 즐거우려고 스포츠를 보는 건데 이참에 강팀으로 갈아타세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팀세탁 같은 모양 빠지는 짓은 못하지."라고 대꾸했지만
그 후로 한화의 맥 빠진 경기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정말 팀을 확 바꿔버릴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실제로 팀세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야구를 보기 시작한 이후 한화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2018년 한 번뿐이었다. 이후 2019년에는 베테랑 선수를 빼고 신인 선수를 많이 기용하는 리빌딩 전략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신인 선수들의 실책이 잦았고 팀의 성적은 물론 경기의 내용과 수준도 형편없었다. 선발 투수 돌려 막기, 루키들의 반복되는 삼진 아웃과 주루 실패를 보고 있으면 내가 이러려고 야구를 보나 하는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아무리 보살팬이라도 더 이상 봐줄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경기가 계속되었다. 나는 결국 당시 가장 성적이 좋았던 두산 베어스로 갈아타기로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향은 대전이지만 당시 거주지는 서울이었으므로 나름 명분이 있는 결정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한화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는 두산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을 하지 못하니 자연히 재미가 없었고 두산이 뻔질나게 이겨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심지어 너무 잘하는 두산 선수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나는 또 '이러려면 몇 시간씩 투자해 가며 굳이 뭐 하러 야구를 보나'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결국 1위 두산과 9위 한화 사이에 양다리를 결친 채 찜찜하게 2019 시즌이 끝났다. 짧은 외도를 끝내고 2020 시즌에 나는 다시 애증 하는 한화로 유턴했다. 팀을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공부 잘하는 옆집 애와 바꿀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2025 시즌 한화가 달라졌다. 현재 7연승을 달리고 있고, 그 7연승이 모두, 그동안 한화에서는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귀했던 선발승이다. 구단 순위도 LG 트윈스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야구를 보기 시작한 이후 최고의 성적이다. 요즘 나의 저녁 시간은 희열과 환희와 감동의 연속이다. 그간에 쌓인 원망과 실망, 한심함은 어느새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지금 이 순간이다. 이런 순수한 환희를 안겨준 한화가 너무 고마워서 앞으로 경기에 지거나 그래서 순위가 떨어져도 좀 너그러워지려고 한다. 심지어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성숙한 팬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야말로 보살 같은 생각도 하고 있다. 이렇게 느긋하고 여유 있는 척하는 이 순간에도, 실상 내 마음은 ‘오늘은 또 한화가 얼마나 잘하려나?’하는 행복한 기대로 일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