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즈케이크 Jan 18. 2022

베를린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인종차별

왠지 모르게 독일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내가 사용해본 Made in Germany 제품들은 유난히 좋았고 함께 일하는 독일 동료들은 일터에서 항상 논리적이고 효과적이었다.


2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유럽여행을 다니지 못한 이유를 핑계 삼아 남편과 함께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베를린으로 게릴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히드로에서 출발해 베를린에 새로 생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깨끗했고 공항직원들의 일처리도 빠르고 깔끔했다. 영국과는 다르게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뭔가 하지 말라는 행동은 하지 않는, 질서과 규율을 잘 지키는 느낌. 역시 독일이구나.


공항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센터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보이는 바깥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 질서 없이 그려져 있는 그라피티. 지하철역에서 나는 소변 냄새. 대낮에 길거리를 다니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 돈을 구걸하는 노숙자들. 바람에 휘날리는 쓰레기와 깨진 술병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질서가 몸에 밴 사람들. 조금 혼란스러웠다.


지금 독일은 코로나로 인해 상점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2차 백신 증명서(혹은 PCR 테스트 음성결과)와 신분증이 필요하다. 우리는 꽤 큰 쇼핑몰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점원은 나에게 말했다. 백신 증명서와 신분증을 보여주세요. 나는 거리낌 없이 모두 보여주었고 다음은 남편 차례였다. 그런데 점원은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들어가세요. 나는 바로 점원에게 물었다. 왜 나만 보여달라고 하고 남편은 예외인 거죠? 점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거 인종차별 아닌가요? 점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여기서 내 돈 쓰고 싶지 않아. 나가자.


백인인 남편의 얼굴은 내 눈치를 보느라 더 백색으로 변했다.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독일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고 오래전부터 이민자들이 정착했기에 인종차별이 없는 줄 알았다. 그동안 내 눈에 보이는 독일은 완벽한 나라였다. 그동안 내 눈에 콩깍지가 꼈었나 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날부터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3차 부스터 백신 증명서 혹은 PCR 테스트 음성결과를 제시해야 했다. 우리는 둘 중 아무것도 없어 첫째 날에는 식당이나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Take away를 해서 호텔에서 먹었다. 다음 날 호텔 체크아웃 뒤 쇼핑몰이 다 문을 닫아 푸드코트도 갈 수 없고, 추운 날씨 탓에 이럴 바에는 공항에 일찍 가서 끼니를 해결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간을 때우려 공항에서 이리저리 면세점을 구경하던 중 사고 싶은 화장품이 마침 할인을 하는 게 아닌가. 프로모션이 아주 크게 보였다. 브랜드 A 35유로 이상 구매 시 10유로 할인. 브랜드 B 모든 제품 5유로 할인. 요즘 파운드가 강세라 영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두 브랜드 모두 구매하기로 했다. 원하는 제품을 들고 계산대로 가니 점원이 원가 그대로 받는다. 점원에게 물었다. 이거 할인 프로모션 하던데 할인된 가격인가요? 그랬더니 점원이 나에게 무슨 말 하느냐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려 묻는다. 할인? 무슨 말 하는 거죠? 우리의 대화를 들은 남편이 계산대로 와서 다시 말한다. 저기 할인이라고 적혀있던데 할인하는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점원이 갑자기 아주 친절한 미소로 대답한다. 아 죄송해요. 할인이군요. 그러면서 아주 능숙하게 할인쿠폰을 서랍에서 꺼내서 바코드를 찍어 차액을 현금으로 돌려준다.


상점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저 점원 정말 할인이었던 거 몰랐던 걸까? 남편은 그저 내 편이 되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한다. 아니. 알고 있었어. 그러니 내가 말하자마자 바로 정확한 서랍을 열어서 정확한 쿠폰을 찾아 정확한 바코드를 찍어서 아주 빠르고 능숙하게 차액을 돌려줬지.


그렇게 와보고 싶었던 독일. 이제 와봤으니 미련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다. 다시는 남편에게 독일에 가자고 조르지 않겠다. 돌아오는 내내 남편은 내심 좋아한다. 내가 드디어 유럽에 대한 환상을 깨버렸다며.

작가의 이전글 이직 이렇게 힘든 거였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