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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조이 Sep 15. 2023

시시비비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시시비비 따지는 대신 우아해지기로 마음먹습니다.

 어린 시절, 말대답을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할머니가 "말 떨어지면 고물 묻을까 봐 그렇게 말대꾸를 하나"고 나무라시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른이 뭐라 하면  냉큼 받아서 대꾸를 하는 손녀를 못마땅해하셨어요. 그러나 저로서는 도무지 제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해야 할 말을 할 뿐인데 그게 왜 어른에게 대드는 것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임플란트 한 자리에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치과에는 먼저 온 환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접수하며 제 차례는 언제쯤 일지 물어보나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곧 저보다 늦게  도착한 예약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환자는 꾸준히 3~4명을 유지하며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간호사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예약환자들 다음이라고 했습니다. " 고객님은 예약을 안 하셨기 때문에 기다리셔야 합니다"  대기실에는 예약날짜를 잘못 알고 온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결국 예약날짜를 잘못 알고 온 아저씨까지 들어가고 저 혼자 대기실에 남았습니다. 저는 간호사에게 가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제차레가 맞나요? "

"네"

" 지금 다른 예약고객이 오면 또 기다려야 하나요?"

간호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한동 바라보다가 "고객님은 예약을 안 하셔서 예약환자들 다음에 하셔야 하는 겁니다." 말귀 못 알아먹는 사람에게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설명하는 태도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단번에 불쾌해졌습니다.

" 예약은 안 했지만 저도 이 병원에서 시술한 환자입니다. 아무리 예약을 안 하고 왔다 해도 예약날짜를 잘못 알고 오신 아저씨까지 제가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어요. 이럴 거면 100% 예약제 운영을 하시든지 처음부터 대기시간이 한 시간 이상 길어질 거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지요" 제 목소리에는 화가 실려있었고 조용한 병원에 크게 울렸습니다. 진료실 의사와  환자들이 제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간호사의 부당한 대우에 혼자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직접 말하는 쪽을 택했고 그 순간 잠시나마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는데 등 뒤로 부끄러움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했다는 후회가 아니라 그냥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 결국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저 자신이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어릴 적 말대답 잘하던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어른들 말씀에도 맞고 틀리고 따지던 그 아이가 몸만 커져서 어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사사건건 따지는 어린 손녀를 걱정하셨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젊은 날에는 시시비비를 따지고 부당함과 정당함을 가리는 일에 민감한 자신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호, 불호가 선명하고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명쾌해야 했습니다. 회색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치부했습니다. 여전히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은 중요하고 정당함과 부당함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옳고 그름에 대한 내 잣대가 자기중심적이 아닌지,  너무 자잘하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무엇보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먼저 이 일이 중요한 일인지 살펴봅니다. 시시비비 따지고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한 발 물러나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 시시비비 따지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조금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한 일 앞에서도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한쪽에서 생겨납니다.


   이제 시시비비 따지는 대신 검정과 흰색을 다 담아내는 회색의 유연함을 닮으려고 합니다. 회색이 지닌 우아함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유연하면 우아해집니다. 시시비비 따지는 대신 유연하고 우아해지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전 06화 생을 두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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