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목요일 아침
어제는 충동적으로 파마를 했다. 아니, 충동적이었다 말하기엔 좀 서운한가? 언젠가부터 내 머릿속에 침투한 [뽀글머리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이상적인 뽀글머리 사진도 모아 왔고 그 사진 속에 내 얼굴을 여러 번 대입시켜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실행으로 옮길 단계까지는 못됐었는데. 어제 누가 명령한 것 마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고 파마를 향해 걸어 나간 거다. 이런 일은 내게 2년에 1번 꼴로 일어나곤 한다. (파마끼?가 보통 1년 반 정도는 가니까 그렇겠지) 나는 이걸 충동파마라고 부른다.
평소와 같으면 주변의 미용실, 최근에 여러 번 방문한 미용실의 후기와 가격정보를 뜯어보느라 예약이 쉽지 않았을 나다. 하지만 충동파마의 매력은 아주 낯선 미용실에서 모종의 불안감 두려움을 마음에 품은 채 앉아있는 시간에 있다. 나는 파마를 향해 현관문을 열어 제낄 때 이걸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생각으론 그랬다.
'머리 말고 볶는 거야 다 같으니, 오늘은 예약 방문 따위 필요 없는 동네 미용실을 가는 거야.'
메리트는 예약이 필요 없다는 것(뜬금없는 파마 손님으로 들어섰을 때 상호 간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 오히려 환영을 받을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합리적일 가격. 무슨 헤어샵의 원장과 부원장과 실장의 디자인 커트와 특수펌과 컨설팅 따위에 질려버린 나다. 돈값은 할지라도, 적어도 파마에 있어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30년간 수없이 다양한 머리통에 롤을 감아왔을 동네 미용실 원장님들이 정답일 거라 믿었다. 믿을만한 경력과 실력 그리고 까다로운 어머니들에게도 납득이 갈만한 가격. 이 삼박자 쿵짝쿵짝쿵짝을 내 머리에. 충동파마 충동파마. 신나서 미용실이 몰린 거리로 걸어갔더랬다.
미용실과 이용원과 이발소가 섞여 존재하는 도보 10분 거리의 상권.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곳이었다.
- (과일 이름) 미용실
- (두 글자 한자어) 헤어
- (사장님 성함) 헤어 스튜디오
굉장힌 고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과일 이름) 미용실은 커트를 잘한다는 짧은 후기와 좋아요 후기들이 가득했다. 지도 어플에 가격 정보는 없었다. 가게 곁을 스윽 지나치며 내부 분위기를 살폈다. 사장님이 기지개를 켜고 계셨다. 수요일 점심시간대가 대목은 아니겠지. 그치만 부담스럽기도 한 걸? 지나쳤다.
(두 글자 한자어) 헤어는 유일하게 가격 정보가 있는 미용실이었다. 파마가 4만 원부터. 비록 2021년도쯤에 올라온 사진 이긴 했으나, 이 골목의 파마 가격대는 이 정도로 형성되어 있겠군- 생각하게 했다. 아니 어쩌면 이 가게만의 강점일지도? 추가적인 정보는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저렴한 가격의 파마라면 내가 겪게 될 상황은 여러 가지다.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 결과를 얻는다, 싼 가격만큼의 리스크를 감당하고 우울하게 나온다, 여러 추가비용이 더해져 더 이상 저렴한 파마가 아니게 된 파마 시술을 받는다 등등. 머리가 아파졌다. 지나쳤다.
맞은편에는 (사장님 성함) 헤어 스튜디오. 이 가게는 리뷰가 가장 좋았다. 다닌 지 20년, 30년이 되었다는 손님들이 많았다. 지도 어플 관리가 되고 있지는 않았다. 역시 가격정보?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사를 가서도 미용실을 못 바꾸겠다는 후기가 내 마음에 쏙 박혀버렸다. 사실 내 마음속 1순위는 (사장님)이었을지도. 마침 가게 앞에 식물들이 예쁘게 가꿔져 있다. 불도 환하게 켜져 있다.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계란 후라이 냄새가 났다. 왼편에서 누가 사장님인지 직원이고 단골인지 모르겠는 분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나는 파마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서 머쓱하게 자리에 앉았다. 약 15분 뒤 내 외투와 짐이 맡겨지고 시술이 시작되었다. 나는 굳이 가격을 여쭙지 않았다. 예상 범위 내일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거칠게 내려지는 샴푸실 리클라이너와 대비되는 야무지고 세심한 샴푸 경험은 인상적이었다. 아베다만 취급하는 고급 헤어샵의 샴푸, 머리맡에 기분 좋은 가습기 디퓨져가 켜져 있는 1인샵의 샴푸, 대학가 주변 머리 공장의 샴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엄마와 할머니는 이 서비스를 참 좋아하시겠단 생각을 했다. 물론 내게도 좋았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수다와 함께 내 충동파마는 시작되었고 또 끝났다. 롤을 풀 때에 젊음이 예쁘단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말리고 나니 더 마음에 들었다. 제법 괜찮은데? 이번 충동파마는 의외의 성공이다. 아니 어쩌면 나도 이제 단골 동네 미용실이 생겨버렸을지도. 행복감이 몰려왔다.
막 부풀어진 머리를 찰랑대며 계산대에 섰다. 계좌이체를 하겠다고 했다. 가격을 들었다.
응?
큰 당황에 이어, 나는 예상금액만큼만 이체해 둔 통장에 딱 그만큼의 웃돈을 얹어, 즉 예산의 2배 값을 사장님 계좌에 보내게 되었다. 어허. 그 순간 사장님이 서비스라며 에센스를 주셨다. 허어. 이 값이면.. 아베다 샴푸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충동파마의 끝은 항상 당황이다. 나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살짝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가 잠깐의 생각 정리를 했다. 그래도 시세보단, 내가 원래 내는 금액보단 적게 냈다는 확신이 있어야 어디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놈의 충동.. 이마를 짚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달달 볶아진 내 머리가 맘에 든다. 돈은 이미 지불했으니 어쩔 수 없다. 눈탱이를 맞았다고 생각하기는 싫고, 눈탱이라기엔 모두들 비슷한 값을 주고 머리를 볶는다. 그러게 왜 맞은편에 4만 원짜리 파마가 있냐고. 어쨌든 충동파마치곤 나쁘지 않다. 당분간 블랙 프라이데이니 연말 세일이니 하는 것들은 내 알바가 아니게 되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충동의 반작용, 충동이 안겨주는 숙제, 짐.. 좀 억울해질 때는 거울을 보고 내 뽀글머리를 만져야겠다. 폭신폭신 뽀글머리를.
여러분, 이번 주말에 충동파마 어때요?
아무튼, 좋은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