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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의 점 Dec 22. 2023

포기할 용기 그리고 승리의 후퇴

[퇴고 프로젝트] 23년 12월 17일 블로그의 글

2023년 12월 17일, 밤 10시경

: '단순히 귀찮아서 키보드에 손가락을 쉬이 올려놓지 못하는건 아닌 것 같아.' 문득 생각했다. '이상은이 원하는 일일까? 그러니까 며칠 전 또렷한 정신이 깃든 아침, 내년 그리고 먼 미래의 꿈을 척척 써 내려가던 그 이상은. 그 사람이 지금의나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쯔읏.. 조급해하지 않겠다고 말해놓고선..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해? 지옥불로 매번 그렇게 선뜻 걸어가버리는데.

밖에선 따뜻하고 밝게 보일지라도, 안으로 들어가면 숨이 턱턱 막힐 걸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왜 매번 이런 식일까? 지금 써둔 다짐이 그럼 다 무슨 소용이냐구?' 

따끔한 이상은의 목소리가, 말이 별 노력 없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과감히 노트북을 닫았다. 이것은 분명한 포기였음에도, 나는 강렬한 승리감에 젖은 채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 파묻혔다.


호기심에 동의를 눌렀던 취업사이트의 '포지션 제안 알림'. 그리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오는 시답잖은 제안에 무심함으로 포장한 우월감을 느끼던 나날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제안 하나에 컴퓨터 화면에선 이메일이 몇 번 오갔고, 어느 기업의 채용 사이트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나의 마음은 신기함과 설렘으로 채워졌다가 기어코 몸집 큰 욕심으로 가득 메워졌다. 이 현상은 나로 하여금 '좋은 인상'이 담긴 증명사진을 만들게 했다. 촘촘하게도 짜인 입사 지원 페이지에 내가 살아온 시간을 숫자와 몇 마디 단어로 뭉개어 입력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증명사진에는 내가 없었고, 압축된 단어들에 내 삶의 다채로움을 온전히 담을 순 없었다.


합격 이후의 날들을 상상하자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역시' '대단' '축하' 비슷한 단어가 담긴 말을 듣고, 일만 잠자코 한다면 무덤 속에서의 삶까지도 쭉 책임져줄 것만 같은 복지를 당연하단 듯 누리고, 입금 내역에 찍히는 두둑한 숫자에 대단한 포근함을 느끼는 삶. 회사의 건물, 회사의 식당, 회사의 카페.

여러모로 바람직한 삶이 그려졌다.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인생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웃고 있는 이상은의 모습이 유독 흐렸다. 상상할 수 없었다. 대신 그 반대의 것들은 튀어나왔다. 서울을 가로질러 출퇴근하는 뭉친 어깨, 흐리멍텅한 눈, 붓기가 채 빠지지 않은 다리.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일, 그 미적지근한 결과. 내 업무는 끝났다는 이유로 미련없이 돌아서는 나. 사무실에서 종일 바쁘게 굴러가는 눈동자. 저 멀리 있는 내 집 안에는 어두움이 깔릴 때까지 꿈쩍도 않고 누워 현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늙은 강아지.


과하게 비관적인 상상이려나? 아니, 나는 무척이나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떠올려볼 수 있게 한 나의 상상력에 감사해질 만큼. 오히려, 차라리 더 참혹해도 좋을 뻔 했다. 아무튼 이상은이 원하는 미래와 대척점에 있는 일상을 따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멍청한 지원 사이트를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포기할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단호해져야 했다. 큰 아쉬움 없이 지원서 저장을 취소하고 로그인을 연장하지 않고 인터넷 창을 꺼버려야 했다.


실행은 쉽고도 빨랐다. 비로소 이상은을 되찾고야 말았다.


며칠 전 내 손으로 적은 글, 강연 요약본에는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느낀 승리감은 내면의 불안함, 겁쟁이가 애써 짊어진 짐덩어리를 내려놓고 돌아선 일에서 왔다. 심지가 있는 나, 내 삶에 다른 사람의 삶을 투영하지 않는 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나. 이 사람이야말로 오늘 밤의 영웅이었다. 그를 잊지 않아야 한다. 믿고 나아가야 한다.


내가 서있는 곳은 벼랑 끝이 아니다. 발 앞으로 주욱 이어진 길의 끝에 분명, 나만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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