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영업으로 3년간 2800명을 만나며 깨달은 것들
첫 직장을 나와 다시 IT 중소기업에 입사한 나는 늦었지만 '직업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영업을 해보기로 했다. 하루에 몇 잔씩 믹스 커피를 마시고 고객사 휴게실에서 담배 피고 잡담하며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엔 술을 마시는 일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첫 직장에서 매뉴얼 번역이나 교육 일을 하면서 기술에 대한 이해도 좀 하지 않는가?
‘과신은 공포로 쉽게 이어진다’는 말처럼 나의 이런 자만심은 영업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바로 두려움으로 변했다. 믹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함께 커피 마셔 줄 고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게다가 고객들은 커피만 함께 마시는 영업을 매번 반기지도 않는다. 그들의 문제점을 들어주고 솔루션을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더 자주 고객과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렇다고 매번 기술자를 대동하고 고객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고객과 고민을 공유하고 솔루션을 줄 수 있는 영업이 되기 위해 기술서적 번역이라는 일에 도전을 했다.
기술을 제대로 알고 고객과 소통하는 영업이 되기로 마음 먹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엔터프라이즈 자바 빈’이라는 기술서적 번역은 6개월이나 걸렸지만 당시 최첨단 IT 기술에 대한 나의 이해를 심화시켜 주었고 그 책 덕에 고객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의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프리젠테이션 뒤에 ‘제가 번역한 책인데요 한번 읽어보세요’하면서 책 선물까지 하고 나니 업계에 나에 대한 평판이 퍼져 나갔고, 고객이 고객을 소개하면서 연쇄반응이 이어져 나는 당시 IT 업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업사원이 된 듯 했다.
고객 한 명을 마주하고 설명하기도 하고 다섯명, 열명, 때로 스무명을 대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월화수목금 오전, 오후 때로는 저녁까지 일 주일에 열번씩은 프리젠테이션을 한 것 같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 만난 고객을 엑셀에 입력했는데 3년 정도 만난 고객이 2800명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여러가지를 얻었다.
우선 나는 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부딪치게 되는 문제 즉 ‘고객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솔루션을 찾았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 문제를 함께 풀어주는 사람’으로 나를 포지셔닝함으로써 나를 찾는 사람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IT 영업으로서 3년간 2800명을 만나며 1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맬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어떤 분야에서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혹은 남다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 역시 ‘3년간 1만 시간’이라는 경험을 돌아보며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1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단순히 경험이 쌓인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 많은 고객과 파트너들을 만나며 딜을 성사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 나는 딜에 실패하고 나서 ‘운이 나빴다’거나 ‘노력이 부족했다’가 아니라 ‘어느 시점이 어떤 것을 했어야 했는데 그걸 놓쳤다’라고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1만시간은 고객들이 경험하는 트러블과 니즈에 대한 임상결과들로 축적되고 재해석 되면서 나를 고객의 상황에 맞는 솔루션을 찾아 줄 수 있는 영업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 준 것이라 믿는다.
1만시간을 거쳐 전문가로 단련되어 온 사람들은 각자가 하는 일은 달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을 것 같다. 몸이 아파 찾아 온 고객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해 나가는 의사도, 고객의 어려움을 짚어내고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나도, 하는 일과 대상, 해결해야할 과제가 다를 뿐 어느 경지에 오르고 나면 서로 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10여년째 다니는 단골 미용실이 있다. 바쁜 엄마가 키우는 착한 아이는 아기 때 종일 잠만 자서 머리 모양 뒤쪽이 납작하다는데 나 역시 농사일로 바쁜 엄마 덕에 뒷머리가 납작해 맘에 들게 머리손질을 해 주는 헤어디자이너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10여년 전 만난 ‘양희 원장’은 나의 핸디캡을 잘 커버해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만들어 준다. 어릴 때부터 미용 일을 해 왔는데 손님과 처음 만나면 두상과 원하는 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충분히 나누고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가 준다. 몇 해 전 독립하여 제법 큰 미용실을 낸 그녀에게 신규 고객과 단골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았다. 단골이 80% 정도라고 한다. 영업으로 치면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한 달에 한 번 그녀를 만나는 날 나는 주치의를 만나는 기분이 된다. 그녀 역시 1만시간,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시간을 거쳐 경지에 오른 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분야에서건 일을 하다보면 하루하루 일상이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좌절과 공허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일에 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1만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다 같은 1만시간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콩나물은 바로 그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만들어 낸 결과의 하나이다. 밑이 막힌 독에 물을 부어서는 얼마 붓지도 못해서 물이 넘쳐 흐르고 콩나물은 결국 썩게 된다. 콩시루에 붓는 물은 결국 밑으로 빠져 나가겠지만, 언제 얼마의 시간 간격으로 얼마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자라나는 콩나물의 품질은 크게 차이가 난다. 어차피 빠져 나갈 물을 왜 붓고 있느냐며, 밑으로 빠져나가야 할 물만 생각하면서 그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목적하는지 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1만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 키운 콩나물은 맛과 영양, 모양과 빛깔이 남 다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