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의 삶은 지금, 어떤가요?

예술 이야기

나의 삶은 지금, 어떤가요?(feat. 영화 《리빙: 어떤 인생》& 웹툰《나빌레라》) 


에누리 없는, 2024년입니다. : ) 


시간을 조금 되감아볼게요. 2023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다들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완벽한 '문화의 날'로 보냈습니다. 참고로 저는 비교적 계획형 인간입니다. '비교적'이라고 붙인 이유는 즉흥적일 때도 많아서인데, 그래도 그  즉흥의 성립 조건과 범위가 좀 한정적이긴 해요. 평소에도 일정을 미리 정해두고 시간을 계획해서 쓰는 편인데 연말은 의외의 변수가 너무 많이 생기잖아요. 그 변수에 다 대응하다 보면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허무하게 지나버리고요. 작년 연말은 긴 코로나19의 터널을 벗어나 맞는 온전한 연말이라 저도 그에 대한 기대가 좀 있었고, 뭔가 이변 없는 소확행을 느끼고 싶어서 일찍부터 구상을 좀 해뒀죠. 


우선, 곧 다가올 제 생일 선물을 걱정할 친구에게 몇 달 전에 연락해 보고 싶은 연극이 있다고, 그거 예매해 달라고 하면서 날짜를 못박았어요, 이런저런 말로 좋은 의미를 다 담아 ㅎ. 그래서 31일 점심 이후부턴 친구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고, 근처 DDP로 가서 제가 포스팅했던 《사그마이스터》 전 설명을 속성으로 해준 후에,  창신동 에베레스트에서 네팔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곤 다시 DDP 근처로 와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시간이 얼추 비슷해서 신년 카운트다운까지 볼까 했는데 그건 무리더라고요 체력적으로. 이것만 해도 진짜 꽉 찬 하루였는데, 친구를 만나기 전 저는 조조로 영화 한 편을 보고 갔죠. 그 영화가 오늘 소개할 《리빙: 어떤 인생》입니다. 

이미지 출처: 알라딘 책 소개 사진촬영: 네버레스홀리다

《리빙: 어떤 인생》은, 우연히 영화 포스터를 봤는데  2023년을 넘기기 전에 꼭 봐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목이 주는 궁금증이 있었고, 무엇보다 배우 얼굴 자체로 한 편의 이야기가 그려져 그 내용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저런 얼굴을 지닌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면 결코 가볍진 않고 분명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큰 이야기 일 거라 추측했는데 역시 그랬고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을 찾았지만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은 큰 울림이 있는 영화였어요. 제 노년의 삶과 모습을 상상해 보게 했고, '나중에 저런 사람으로 죽고 싶다' 란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극장에 계셨는데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앉아 계셨던 분들이 많았으니 그분들에게도 좋은 의미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진촬영:네버레스홀리다

영화 배경은 1950년대 영국 런던입니다. 빌 나이(Bill Nighy, William Francis Nighy, 1949-)가 분한 로드니 윌리엄스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타고 집과 직장을 오가며 기계적인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고 있는 런던 시청 공무원이에요. 윌리엄스는 불필요한 대화나 사교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그저 '외딴섬'처럼 섞이지도, 휩쓸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원칙대로 타인과 평행선을 유지하며 사는, 그림자 같은 인물이죠. 그렇게 관심도, 열정도, 목표도, 결심도 내 보이지 않고 정년 퇴임에 가까워지는 일상을 물 흐르듯 유지하고 있던 그의 삶에 어느 날 큰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거든요. 영화는 윌리엄스가 곧 죽는다는 암울한 진단을 받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진정으로 원했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요. 물론 이변 없이 윌리엄스는 죽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죠.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51908/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윌리엄스의 일상은 특별한 굴곡 없이 나름 평범하고 안정적이었어요. 회사에서도 담당 부서의 고위 관료였지만 그와 직원들 책상에 무수히 쌓인 민원서류들과 민원인을 대처하는 방법에서 보이듯 비효율과 저능률의 굴레 속에 익숙한 듯 보조를 맞추며 지냈고요. 그러다 맞이한 '죽음 통보'는 그저 묵묵하고 냉담하게만 살아왔던 본인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윌리엄스는 사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아내와 사별 후 자신의 집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며 재정적인 것을 부담하고 있지만 뭔가 더 눈치 보고 대우도 못 받는 듯했고,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진단을 받고 아들 내외에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동상이몽인 아들 내외의 말을 우연히 들은 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삼켜버리니까요. 그리곤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51908/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매일 타던 기차도 타지 않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은 그는 단 하루라도 인생을 즐겨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몰랐죠. 우연히 만나게 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극작가 서덜랜드는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윌리엄스에게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쾌락을 소개해 줍니다. 잔잔한 물 같던 윌리엄스의 삶이 흙탕물로 변해갈 듯했지만, 소모적으로 남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이 원했던 삶의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빛을 꺼트리지 않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생애 마지막 목표로 삼죠.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 2차 세계대전으로 폭격되어 오랫동안 방치된 지역을 어린이 놀이터로 재개발해 달라는 청원을 완수하는 것으로요. 그리고 그의 변화는 주변의 변화도 이끌어 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51908/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영화에선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삶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그의 경제적인 지원은  필요한 아들 내외, 매너리즘에 빠진 회사 동료들 그리고 그 속에 빛과 같은 두 인물이 있죠. 아직 관료주의와 매너리즘에 물들지 않은 신입 직원 피터와 퇴사 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사는 마거릿이요.  윌리엄스는 마거릿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아요. 마거릿은 사무실 가장 말단 직원이지만 주변 시선에 함몰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직장 대신 본인이 원하는 삶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노력하고 선택하는 인물이거든요. 그 밝고 긍정적인 기운은 윌리엄스에게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결심을 굳히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마거릿은 윌리엄스의 비밀을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요.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어린이 놀이터 조성이라는 목표 완수만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리고 뜻을 이룬 날, 소복이 쌓이는 눈을 행복하게 맞으며 놀이터 그네 위에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51908/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이 영화는  인상적인 포인트들이 많아요.  세간의 때 묻은 시선도 담겨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아직 좋은 사람이 있다는 희망도 담겨있고요. 나의 삶은 물론이고,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가족과 직장 생활 그 외 주변의 시선과 태도가 담겨있어,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한 대상을 바라보는 평가와 시선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인지도 새삼 다시 느꼈고요.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았는데 저는 유독 윌리엄스의 뒷모습이 기억납니다. 이건 영화를 보시면 공감하게 되실 거예요.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9051908/mediaindex?page=1&ref_=ttmi_mi_sm

이 영화의 원작은 1952년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黒澤明, 黒沢明, 1910-1998) 감독의 영화 《生きる 이키루》입니다. "살다"라는 뜻의 영화 《이키루》와 《리빙: 어떤 인생》의 내용 및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골격은 같은데, 원작이 조금 더 허무주의 성격이 짙어요. 《生きる 이키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주인공 와타나베 간지 역을 맡은 시무라 다카시(志村喬, 1905-1982)의 눈빛 연기입니다. 시무라 다카시는 연극 무대로 배우 경험을 쌓았고 영화계에 입문한 후 평생 인연인 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만나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데뷔작에도 출연한 감독의 페르소나로, 일본의 국민배우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을 많이 보질 못해서 스타일이 어떻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生きる 이키루》에선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꽤 현실적이고 과장되게 표현되어 더 처절해 보였고, 그 바탕에는 당대 일본 공기업의 관료주의와 일본 사회의 허무주의 그리고 개인의 이기심 등도 깔려있어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 짙습니다. 감정적으로 더 격렬하고 여운도 씁쓸해서 보는 내내 마음이 좀 힘들더라고요, 저는. 그럼에도 당대 일본 사회 분위기나 장례문화 등 문화사적으로 비교 및 참고 포인트가 있어 두 편을 다 보길 권하지만, 꼭 먼저 《이키루》를 본 후에《리빙 : 어떤 인생》을 보길 권해드립니다. 그래야 마구 헤집어진 마음이 평화로워지거든요. 

이미지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0044741/mediaindex/?ref_=tt_mv_sm

 그리고 기회가 되면 위 작품들을 본 후에 바로 작가의 그림책 『거인의 침묵』도 챙겨봐 주세요. 다른 결이지만 제겐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든 작은 공원이 맞은 미래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거든요. 

이미지 출처: 알라딘 책 소개

 웹툰《나빌레라》도 삶을 다시 되짚어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동명의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고 워낙 유명한 웹툰이어서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겠죠.  저는 작년에 이 작품을 책으로 봤는데,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꿈과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에 대한 참고가 된  작품이면서 툭하면 눈물샘을 자극해, 다 보는 데 꽤 애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드라마 버전을 볼 엄두는 안 나네요 아직은.    

이미지 출처: tvN 드라마 나빌레라

HUN (지은이), 지민(그림) 두 작가의 협업작 《나빌레라》는 다음 웹툰 평점 집계 이후 유일하게 만점을 받은 웹툰이라고 하죠. 2017년에 전체 5권이 완간되었고, 특별판인 《나빌레라 커튼콜》도 202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나빌레라》는 일흔 살 할아버지 심덕출과 손자뻘인 채록의 이야기입니다. 처한 상황과 목표는 달랐지만 "발레"라는 꿈을 향해 간다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의 성장기로, 이 둘은 살아온 배경과 문화는 달랐지만 서로의 결핍을 치료 및 보완하며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보호자, 가족이 되어가죠.  

이미지 출처: 알라딘 책 소개, 다음 웹툰

인상적인 장면들과 대사가 정말 많아요. 저를 화나게 또 제 코끝을 시리게 만든 장면들이죠. 발레를 하겠다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꿈이 아닌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반대하는 자식들의 모습, 스스로도 믿지 못한 채록이에게 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우쳐 주는 장면, 솔직 담백한 노년기 부부의 모습, 노년의 소중한 꿈을 지켜주려 애쓰는 주변인들, 기억력을 잃어가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을 추스르는 채록의 모습, 후에 (할) 아버지를 응원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지닌 가족들의 모습 등등 정말 너무 많아요. 무엇보다 누군가의 꿈을 가볍게 폄하하지 않고 진심으로 응원하며 도와주려는 좋은 사람들이 심덕출 할아버지 주변에 있었다는 게, 심덕출 할아버지 역시 그런 사람이란 게  좋았습니다. 보편적 인류애가 상실된 것처럼 보여도, 저 역시 성선설을 믿거든요. 

이미지 출처: 알라딘 책 소개

《나빌레라》를 보다 보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왜 '닮는다'라고 하죠?'어떤 대상과 성질이나 외모가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는 것'을. 《나빌레라》속 심덕출 할아버지는 닮고 싶은 어른입니다. 그가 주변에 했던 배려들은 일반적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잖아요. 오은 시집 『없음의 대명사』엔 "사람은 고유명사로 태어나 보통명사로 살아간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심덕출 할아버지는 개개인을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봐주는 캐릭터더라고요.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주변도 감화되는 거고요. 


예전에 한 친구가  제게 고민을 토로하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왜 아무도 (네가 해 준) 그런 말을 (내게) 해주지 않았던 걸까? 인생을 잘못 살았나?"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거쳐오면서도 그가 듣고 싶었던 지극히 평범한 얘기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분명 그 말을 해주길 바랐던 대상이 있었을 텐데요. 그렇다고 내막도 잘 모르면서 인생 잘못 살았다고 말할 순 없었기에, 


"뭐래.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면 되잖아.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라고 말을 맺었죠.  


어려운 일이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건.  

그럼에도,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 오늘도 노력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김종학:사람이 꽃이다》, 현대화랑, (~04.0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