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예술을 체험하는 다양한 방법,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오늘 이야기할 소재는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다큐멘터리입니다.
107분 영상물 한 편에 400여 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이니 시간은 좀 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늘어가는데, 이번에 소개할 책과 다큐멘터리엔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방법'이 담겨 있어, 학창 시절 필독도서처럼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단 바람을 담아 적어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川内 有緖, 1972-)가 '전맹 미술 감상자'인 시라토리 겐지(이하 '시라토리 씨')와 함께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감상한 일화들을 정리한 에세이입니다. 제53회 오야 소이지 논픽션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2 서점 대상 논픽션 부문 대상 수상작입니다. 이 책에 관심이 간 건 한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로, 그 다큐가 바로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2022)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와《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저자와 감독은 모두 가와우치 아리오입니다. 매체는 다르지만 등장인물도 이야기의 중심인물도 같습니다. 가장 큰 차별점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가 다르다는 건데, 책은 가와우치가 시라토리 씨와 함께 한 예술 감상에 대한 기록이고, 다큐멘터리는 시라토리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만약에 두 작품을 다 볼 생각이라면 먼저 책을 본 후에 다큐를 보길 권해드려요. 시라토리 씨에 관한 이야기나 같이 감상한 예술 작품과 상황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으니까요.
이 작품이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건, 시라토리 씨가 "전맹" 상태의 미술 감상자이기 때문입니다. 전맹(全盲)은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시각에 장애가 있는 상태"로, 보통 예술 감상은 "보거나 읽은"후 느낀 감정적 행위를 지칭하잖아요. '감상'이란 건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즐기는 것을 이르지만, 우리는 종종 보거나 듣지 않으면 감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강하게 드러내곤 하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즐기는 방법을 다 모른다는 생각은 덮어둔 채로요. 그런 점에서 이 책과 다큐는 타인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고,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꼭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봐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시라토리(1969- ) 씨의 부모님은 모두 눈이 잘 보였고 일가친척 중에도 시각장애인은 없었다고 해요. 그는 '장애인은 불행하다'라는 걸 전제에 둔 논의가 공공연하게 이뤄진 시대에 태어났고,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효고현 위생부에서는 행정 기관 주도하에 '불행한 아이 낳지 않기 운동'도 펼쳐졌다고 하죠. 찾아보진 않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았으리라 짐작하는데, 그렇게 차별은 늘 익숙하고 능숙하게 언어와 행동 곳곳에 묻어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시라토리 씨의 가족들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 = 틀림없이 고생한다'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요.
가족들은 그가 두 살 때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때부터 고민은 커졌지만 미약하나마 있는 시력으로 일상생활을 하게 했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시라토리 씨는 기숙사를 둔 맹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중학교 때 즈음 시력을 완전히 잃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학교에서 스스로 이불을 깔고 갰고, 빨래와 청소도 하며 점자 학습, 흰 지팡이를 이용한 도보 훈련 등 시각장애인이 독립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워왔기에 지내긴 괜찮았죠. 후에 안마사라는 직업도 갖게 됐고요. 시라토리 씨를 특히 아꼈던 할머니는 거듭해서 그에게 "겐짱(할머니가 부른 시라토리 애칭)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꼭 감사하다고 인사하렴"이란 말을 했고, 어린 시라토리 씨는 '그럼 눈이 보이는 사람은 노력 안 해도 돼? 치사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에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평범한 거고, '보이는' 상태는 몰랐기에 '보이지 않으면 고생한다'라는 말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물론 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세상엔 아주 많지만 어쨌든 시라토리 씨는 지금처럼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국 해냈으며,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듯한 예술 감상의 영역에 당당하게 입성합니다.
시라토리 씨가 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건 1995년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처음 방문했죠.그리고 그 즐거운 시간이 계기가 되어 미술관에 다가가기 시작했다고 해요. 1996년 나고야시 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전람회를 혼자서 처음 방문했는데, 그 당시엔 지금처럼 만져서 느끼거나 말로 설명해 주는 보조 장치가 일반적이지 않았으니 꽤 고단한 여정이 되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근데, 미술관까지 찾아가는 것도 녹록지 않았을 시라토리 씨는 어떻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까요? 요즘이야 규모가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도슨트, 오디오 해설, 수어 해설 등을 감상을 돕는 보조 장치로 제공하지만, 시라토리 씨가 미술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런 걸 기대하긴 아주 어려웠고,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의 감상은 만져서 감상'해야 한다는 기존 개념이 강했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손을 대면 안 되고 '눈으로만 보는' 대상이잖아요, 세상에 하나뿐이니.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미술관에 전화를 걸어 이런 문의를 합니다.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잠깐이라도 상관없으니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이런 경우가 흔하진 않은데 그땐 더 의외성을 띤 문의 전화였겠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다수의 방법을 "정상"이라 규정짓고 소수가 감수하는 불편을 당연시하는 부분도 있는데, 시라토리 씨 역시 끈질기게 미술관에 문의한 끝에 그가 바라는 "대화형 감상 투어"를 해주는 미술관과 감상 메이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쭉 전맹 미술 감상자로 눈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작품을 감상해 왔죠. 때로 호스트로, 때론 게스트로. 그리고 그 스스로가 작품이 되어보기도 하면서요.
저도 가끔 작품 설명을 할 때가 있는데, 비슷한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도 작품을 설명하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눈으로 보고 배경을 설명해도 작품의 난도에 따라, 감상자에 따라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많으니까요. 게다가 시간제한이 있는 설명은 늘 일방향이라 1:1 해설이 아니라면 '그냥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란 뉘앙스를 품은 표정을 봐도 추가 해설을 덧붙이긴 어렵고요. 저는 예술작품의 의미도 의미지만 작품이 내뿜는 감각을 각자가 느끼는 대로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갤러리나 미술관 투어를 다니다 보면 작품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안내지에 의존해서 다니는 분들을 꽤 많이 봅니다.
영국 테이트 미술관 조사에 따르면 개별 작품 당 관람객들이 평균적으로 머무르는 시간은 8초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요. 어쩌면 8초도 머무르지 않을 때가 많죠. 그런 면에서 시라토리 씨의 "대화형" 감상법은 보는 작품 수가 적고 시간은 길지만,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도 꽤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해외 미술관을 다니다 보면 종종 작품 주변 구석에 앉아 스케치를 하는 분들을 만나잖아요. 저도 예전에 과제로 국립중앙박물관 한 전시실에 들어가 유물을 스케치한 적이 있는데, '제대로 봤다'라고 말하려면 그 정도의 관찰 시간은 필요하지 않나 싶긴 하거든요. 시라토리 씨가 함께 작품을 보는 목적은 정답을 찾거나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을 거고, 얼마큼 이해했느냐 봤느냐의 양이 아닌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며 어떤 디테일이 있는지, 그게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어떤 감상이 드는지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니까요. 마주 보고하는 대화가 아닌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하는 대화처럼요. 참고로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스케치하다 포기한 유물이 있는데, 작자 미상의 <사현파진백만병도> 8폭 병풍입니다. 가로 418cm, 높이 178cm의 대작인 데다 디테일도 많고, 무엇보다 제가 미술 실기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맞닥뜨린 작품이라, 아주 난감했죠, 10년도 훨씬 지났는데 이 어려운 이름이 안 잊힐 정도로요. 언젠간 전시가 될 테니 그때 꼭 한 번 살펴보세요.
시라토리 씨가 원한 '대화형 감상'이 좋은 건 맞지만 이런 대화 역시 훈련은 필요합니다. 대상에 따라 사용하는 어휘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야 하니까요. 시라토리 씨에게 말로 작품을 설명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우리에게 익숙한 색이름들과 형태 등을 빌려서 이야기하게 될 텐데, 앞서 말했듯 시라토리 씨는 두 살 때부터 잘 보이지 않았고, 중학교 땐 완전히 시력을 잃었으니 그가 이해할 수 있는 폭은 생각보다 꽤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성인이 된 후에 점자나 다른 방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통된 언어와 형태, 지식을 학습했다고 해도, 분명 차이는 존재할 거고요. 일본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점자 도서나 점자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진~~~ 짜 한정적이거든요. 만약 시라토리 씨보다 더 빨리 시력을 잃은 분이라면, 일반적인 색 단어나 형태 설명은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거란 것도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죠. 그러니 시라토리 씨에게 작품을 설명한 지인들 역시 오랜 시간을 꾸준히 투자한 끝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고요.
그런 과정들이 책과 다큐에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저는 가자와 사치코의 <<Dyslympics 2680>(2018, wooodcut print( Japanese paper, oil ink), 242.4x 640.5 cm)이 나왔을 때, '헉... 저걸 어떻게 설명하지??' 하며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가자와 사치코(1972-)는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후 & 컨템퍼러리( Postwar & Contemporary) 작가입니다. 목판화 기법으로 복잡한 이미지들을 구현하는데, 검은색 하나만 사용하지만 음영과 채색을 잘 변주해 꽤 드라마틱한 구성을 보여주죠. 작품 크기도 크지만 거의 빈 공간 없이 디테일이 섬세한데, 보이는 이미지는 허구이나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현대 사회와 과거 역사를 반영하는 것들이 많아 꽤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은 뉴욕 모마 소장품으로 시각적 이미지도 그렇지만 내재된 의미도 정말 심오해요.
<Dyslympics 2680>은 미래 도시인 디스림피아(Dyslympia)에서 2680년(2020 A.D.)에 열린 가상의 올림픽 개막식을 묘사한 목판화 작품입니다. 우생적인 생각에 기초한 사회 계층과 질서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 축제로, 축제의 장면처럼 보이나 국가우생법( National Eugenic Law)과 국가 권력 통제의 부당함을 주제로 하죠. 작가는 전체주의적 거대한 힘이 보여주는 무자비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품 속 주배경이 되는 경기장은 단테 알리히에리Dante Alighieri의 『디바인 코미디』(Divine Comedy)에서 인용했고, 그림 왼쪽엔 2020 도쿄 올림픽의 새 국립경기장 건설 현장의 이미지를, 그림 오른쪽엔 시멘트 채석장을 등장시켰어요. 화면엔 등급화된 계층이 등장하는데, 왼쪽에는 최고의 청년들로 구성된 A 등급 팀이 행진하고 있고, 중앙에는 B 등급 팀이, 오른쪽엔 C 등급 이하의 우생학적으로 '열성(recessive)'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계층이 자리하고 있죠.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재생산이 금지되고 이들의 영혼조차 건강한 사회로 진입하는 게 금지되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 이들은 건강한 축제 성공을 위한 희생물이 되어 시멘트와 함께 구멍에 부어집니다. 그 외에도 비극적인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었는데 제대로 봤다고 얘기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구석구석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었어요. 참고로 도쿄 올림픽은 초대 일왕 탄생 2600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1940년에 처음 계획되었는데, 당시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면서 취소됐고, 취소된 지 80년 만에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됐다고 해요. 작품 제목에 들어간 '2680'은 제국주의 시기를 상징하고요. 대작인 데다 은유적인 디테일이 많으니 나중에 뉴욕 모마를 가게 되면 꼭 잊지 말고 찾아보세요. 그리고, 시라토리 씨가 이 작품을 감상한 방식은 책이나 다큐로 꼭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엔 여러 작가의 작품이 등장합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1969-)의 작품도 있죠. 정연두 작가는 워낙 유명해서 전시를 좀 보셨다면 익숙한 이름일 텐데, 저도 이분 작품 참 좋아합니다. 몇 달 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백 년 여행기》도 좋았고요. 시라토리 씨와 정연두 작가의 인연은 2014년에 시작됐는데, 당시 정연두 작가는 미토 예술관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를 하며 장기 체류 중이었고, 전맹이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큐레이터와 함께 시라토리 씨의 마사지숍을 찾아갑니다.
정연두 작가는 시라토리 씨의 사진을 아주 좋아했다고 해요. 시라토리 씨에겐 미술관을 다니는 것 외에도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거든요. 맹인답지 않은 걸 하고 싶은 이유에서 시작된 취미지만, "다시 읽지 않을 일기"처럼 기록된 그의 일상은 당시 40만 장이라는 엄청난 이미지 데이터로 축적되어 있었죠. 그렇게 공개되지 않고 하드디스크에 쌓여있던 사진들은 정연두 작가를 만나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별 이슈 없이 지나갔는데, 며칠 뒤 시라토리 씨를 찾은 정연두 작가의 손엔 새 디지털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가 들려있었고, 이를 시라토리 씨에게 선물합니다. 시라토리 씨는 그의 마음과 선물을 받았고, 그 사례로 그가 준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한국에 보냅니다. 그 사진들로 만들어진 비디오 작품이 <와일드 구스 체이스 wild-goose chase>(2014)예요. '와일드 구스 체이스'는 막막한 추적, 부질없는 시도, 막막한 추구, 헛된 추적'의 뜻을 지닌 관용어로, 시라토리 씨가 무척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오조네 마코토(Ozone Makoto)의 연주곡 이름이기도 하죠. 영상은 오조네 마코토 연주가 진행되는 4분 49초 동안 시라토리 씨의 사진으로 채워지는데,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오조네 마코토의 연주는 시라토리 씨의 사진과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시라토리 씨는 오른손에 시각장애인을 상징하는 흰 지팡이를 잡고, 왼손으로 배 쪽에 댄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죠.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초점을 맞출 순 없기에 구도도 각도도 초점도 제각각이지만,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채 의도한 듯 표현된 사진은 의외로 많은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그렇게 그는 우산을 들어야 하는 날만 제외하고, ‘어디도 향하지 않는 사진'을 지금도 찍고 있습니다. <와일드 구스 체이스>는 현재 일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 출품되었으니 전시장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 계절에 어울리는 오조네 마코토의 연주도 꼭 검색해서 들어보시고요.
또,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이 등장하는 <마술사와의 산책>(2014)에도 시라토리 씨가 등장합니다. 영상이 진행되는 55분 15초 동안 시라토리 씨와 오조네 마코토도 등장하는데, 시라토리 씨가 오조네 마코토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를 출연시키기 위해 정연두 작가가 직접 오조네 씨한테 부탁의 편지를 썼다고 해요. 정연두 작가의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에도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룬 현실이 그 안에 담겨 있는데, 이 두 작품은 미토 예술관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개최된 전시회 《정연두: 지상의 길처럼》(2014~2015.2)에서 발표되었고, 시라토리는 출연자와 작가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예술 창작자와 향유자로서 더 묵직한 발걸음을 남겼죠.
시라토리 씨는 딱히 미술 관람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결과적으로는 미술을 보는 행위를 통해서 그때까지 ’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품었던 열등감,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있던 장벽을 없앨 수 있었던 거죠. 반대로 우리도 장벽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요.
예전에 눈을 안대로 가린 채 흰 지팡이 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바닥에 노란색으로 깔린 유도 블록과 제 손에 쥐어진 흰 지팡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체험하는 그 잠시 동안도 그 두 개가 제게서 벗어나거나 느껴지지 않았을 때의 공포가 지금도 생생하거든요. 《어둠 속의 대화》는 체험 프로그램 중 스테디셀러인데, 워낙 유명해서 많은 분들이 이미 해보셨겠지만 이 체험 역시 어둠 속에서 지팡이와 안내자의 소리에만 의존합니다. 안대로 눈을 가리진 않지만 완전히 빛이 차단된 공간이라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때도 또 느꼈죠, 제 손에 쥐어진 지팡이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주는 위안을요. 참고로,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땐 먼저 의사를 묻고, 그다음에 내 손 등을 가볍게 상대의 손등에 댄 후에 팔꿈치를 잡거나 잡도록 하는 게 예의라고 합니다. 급한 마음에 손을 덥석 잡아끌면 크게 놀라거나 다칠 수 있다고. 아직 우린 배워야 할 게 많더라고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다큐멘터리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MMCA 영상관에서 봤습니다. 아시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는 전시실 외에도 영상관이 있다는 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엔 일반 전시실 외에도 예술영화, 실험영화, 국제영화제 등 다양한 영상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필름앤비디오(FILM &VIDEO)라 표기되는 MMCA 영상관과 여러 장르가 융복합된 현대미술의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보여주는 MMCA 다원 공간(멀티 프로젝트 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상영하는 영상은 예술 전문 다큐와 영상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 다른 곳에선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죠.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하거나 빈 좌석이 있을 경우 현장 예약하면 되는데 좌석수가 총 122석이라 아주 꽉 찬 경우는 아직 못 봤어요. 스크린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고 의자도 편하고요. 단지, 상영시간이 제한적이라 날짜와 시간을 잘 맞춰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서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챙겨 볼 만한 작품들을 많이 상영하니 꼭 기억해 두세요.
이 작품들을 본 후에 국공립 기관에서 진행되는 문화접근성 프로그램들을 찾아봤는데,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더라고요. 그래도 나아진다는 게 중요한 거니,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우리도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