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Elmgreen & Draset 《Spaces》》, 아모레퍼시픽미술관, (2024.09.03~2025.02.23)
단풍 절정기를 지나 폭설로 존재감을 알린 겨울 초입을 막 통과한, 2025년 새해 첫 주에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입니다. ^ ^ ::
올해 포스팅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현대미술가 기획전 엘름그린&드라그셋 《Spaces》 전시로 시작합니다.
엘름그린&드라그셋 《Spaces》는 두 작가의 협업 30년을 기념한 전시입니다. 관람 요금이 에누리 없이 18,000원 임을 감안해도, 아트신(art scene)에서 핫한 듀오의 아시아 최대 규모 출품작을 놓치긴 아쉽죠.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전시 외에도 안팎으로 구경하거나 즐길 거리가 있어 시간 쓰기도 좋고, 다른 미술관처럼 관내 사물함 비용을 받거나 시간제한을 두지 않아 에누리는 없어도 가성비 및 가심비가 좋습니다.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은 북유럽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듀오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Michael Elmgreen, 1961-)과 노르웨이 트론헤임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Ingar Dragset, 1969-)은 1994년 코펜하겐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인연을 맺었죠. 당시 엘름그린은 시인이었고, 드라그셋은 연극 무대 연출가로 실험극 작업을 하던 중이었대요. 두 사람 모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1995년부터 아티스트 듀오로 시각 예술 맥락의 공연을 함께 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예술 실험을 자유롭게 하며 존재감을 키웠죠. 다행히 이 분야에 대한 예술적 에너지가 잘 맞았고, 사적 관계의 친밀함도 더해져, 현재까지 베를린을 기반으로 퍼포먼스와 설치, 건축 요소가 도입된 공간 작업 등 다양한 작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번 아모레퍼시픽미술관 《Spaces》전시는 5개의 주제 공간과 45점의 출품작으로 구성됐어요. 작품 수가 많지 않은 듯해도 작품이 놓인 공간 자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작품 수가 적단 생각은 안 듭니다. 오히려 규모나 디테일 면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지점이 많아요. 전시장으로 진입하는 1층 입구부터 출품작을 배치한 것도 색다르고요.
메인 전시 공간은 크게 집, 대형 수영장, 레스토랑, 주방, 아틀리에로 구분됩니다. 모두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실재 사이즈의 공간으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꽤 넓은 공간임을 새삼 일깨워 주더라고요. 이 전시를 현장에서 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죠.
모든 공간이 다 인상적인데, 그중에서도 처음으로 만나는 집 설치작인 'Shadow House(2024)'는 묘하게 익숙한 듯 낯선 공간입니다. 140m2(42.35평)의 이 집은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 등을 갖춘 구성으로, 엘름그린&드라그셋 작업 최초로 지붕이 있고,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설계된 가족 주택이라고 해요. 이 ‘Shadow House’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아마 처음 보는 작품을 익숙하다고 여긴 이유가 바로 이거겠죠.
가족 관계와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는 '집', '가정'이란 주제는 그들이 반복적으로 다뤄온 소재입니다.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을 집으로 전환한 전시 ‘수집가들(The Collectors, 2009)’과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뮤지엄 내부를 건축가의 집으로 재구성한 ‘내일(Tomorrow, 2012)’ 이 대표 사례죠.
사실 엘름그린&드라그셋이 전시장에 '집 한 채를 짓자'라고 미술관에 제안했을 때만 해도, 미술관이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거란 기대는 안 했다고 해요. 그럼에도 시도해 보고 싶었고,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땐 이런 방식이 처음이라 작업하는 내내 정말 신이 났다고 하죠.
실재 공간 구성, 가구 및 오브제들도 인상적이지만 가장 주목을 끈 건 통창 가까이 서서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내려 그은 소년이에요. 입김으로 만든 뿌연 김까지도 완벽하게 묘사되어 약간 무서우면서도 자꾸 호기심을 자극하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소년의 표정과 손끝을 관찰하게 됩니다.
연인이나 관계를 암시하는 작품들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키스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연인들'을 연상시키는 두상, 두 개의 동일한 세면대와 거울을 연결하는 길고 구불구불한 강철 배수관으로 구성된 조각 그리고 마주 보는 침대 등 보편적인 관계에 대한 은유이면서 두 작가의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오브제란 생각이 들죠. 한 인터뷰에서 엘름그린&드라그셋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때부터 10년 동안 연인이었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같이하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이자 솔메이트여서 헤어지더라도 예술적 협업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라는 말을 남겼죠.
아티스트의 사적 얘기가 아니더라도 출품작 중엔 '다시는 보지 말자!', '무제(연인)', '헤어지다'처럼 스토리를 엮기 좋은 제목들이 많아서 자기 경험에 맞춰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긴 합니다. 참고로, 앞서 말한 배수관 작품이 '헤어지다 Separated' (2021)로, 파트너 간의 친밀함과 감정적인 결합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표현한다고 해요.
전시 출품작엔 이별과 상실, 유머 등 감정에 관한 요소도 반영되었다고 하니, 자신의 경험을 작품과 마주했을 때 연상되는 감정에 집중하면 조금 더 흥미롭게 전시를 관람할 수 있겠죠.
아! 집 안에선 한국어 라디오 방송이 나옵니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은 빛이 음식의 맛에 미치는 영향에 매우 관심이 많은데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디오 방송 대본을 직접 쓰고 녹음해 틀어둔 거죠. 이 집 공간에만 안팎으로 18점의 출품작이 있으니 스쳐 지나가지 말고 여유를 갖고 찾아보세요.
공간은 대형 수영장으로 이어집니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이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공간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만들고 싶어 했던 공간이 바로 수영장이죠. 수영장은 공간감이 엄청납니다. 여기가 미술관이라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리고, '원래 수영장이었구나'라고 확신하게 되거든요. 이곳에서 많은 전시를 봤음에도 그 이전 기억이 현재의 작품에 전혀 오버랩되지 않아요. 그런 오류를 당연시하게 하는 건 각 공간에 사용된 색상과 소재입니다. 집에 사용한 콘크리트, 수영장의 크림색 타일과 하늘색 수영장 바닥, 주방의 형광색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색과 조명이 공간을 더 진짜로 만들어줍니다.
물이 빠졌거나 채워진 수영장은 작가 작업에서 반복되는 소재이자 주제입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수영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놀이, 강의, 신체 활동과 연관이 있다. 우리가 옷을 입지 않고 신체를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다. 또 수영장에서 착용할 수 있는 옷은 통일되어 있다. 뭔가 민주적 특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수영장이란 자연을 복제하려는 도시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바다나 계곡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를 연상시키는 일상과 다른 공간이고, 거기서는 해변에서와 같은 행동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흥미롭지 않나? 전시장 내 이 인공의 공간에서 관람객은 VR 고글을 쓴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 아니면 관람객들? 우리는 그 소년이 보고 있는 가상현실의 일부로 실제가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미술관 속 수영장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죠.
이번 전시엔 공공장소의 쇠퇴와 공동체의 상실을 의미하는 수영장을 무대로 고대 조각 같은 현대 남성 조각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고립 및 성장이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각자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게 특징이에요. 수영장 반대 끝에서 쌍안경으로 관람객과 마주하는 안전요원도, 창 너머의 화면을 마주하고 있는 소년도 관계의 고립과 단절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죠. 이 공간엔 6점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별다른 표식 없이 벽면에 있으니 잘 찾아보세요. 보름달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수영장을 지나면 바닥을 향해 거꾸로 세워진 건축물 조각이 나옵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막상 그 아래 서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아찔하죠. 각도를 달리하며 차분히 보다 보면 홍콩, 상하이, 런던 같은 대도시의 새로운 금융 중심지에서 봤던 익숙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를 통해 글로벌 대도시 간 심화된 경쟁 때문에 지역 정체성이 타 지역과 비슷해져 가는 모습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설치 공간인 ‘더 클라우드(The Cloud)’는 한국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공간입니다. 리셉션과 식당으로 구분되는데, 리셉션에는 동물 가발을 쓰고 고객 응대나 전단지를 돌렸을 법한 인물이 긴 소파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죠. 레스토랑 안에는 비어 있는 여러 식탁 중 단 한 테이블에 단 한 명의 여성이 앉아 핸드폰을 응시하고 있고요.
이 공간에 처음 들어섰을 땐 관람객 휴게실을 만들어 둔 건가 싶었어요. 레스토랑 식탁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는 여성은 실재 인물인 줄 알았고요, 너무 사실적이라. 가짜라고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명과 주변 모든 설치가 너무 완벽하거든요. 확실히 자신과 타인에 의해 평가되는 '조명 효과'가 있긴 한듯합니다.
참고로 레스토랑 테이블에 홀로 앉아 영상 통화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여성의 작품명은 '대화 The Conversation(2024)'입니다. 그녀가 대화하는 가상의 친구는 모바일 화면에서 최근 실패한 연애에 대한 독백을 내뱉고 있죠. 여성과 핸드폰 속 인물은 물리적 존재와 디지털 세상 속 존재라는 현대인의 두 모습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라는 존재-부재의 동시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여성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그만큼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이며 그 경계는 어디에 있는 건지를 자꾸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더 클라우드는.
더 클라우드는 뒤에 있는 갈색 문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됩니다. 이 갈색 문도 너무 실재의 문 같아서 이걸 열어도 되나? 하는 사소한 걱정이 들긴 하더라고요. 어쨌든 문을 열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Untitled (the kitchen)'이란 이 공간도 분위기가 묘합니다. 실험실과 주방이 붙어 있어 식품 연구소가 떠오르죠. 너무 설비들이 사실적이라 금방이라도 이곳에서 요리 하나를 뚝딱 만들어 레스토랑으로 서빙 갈 것 같은 공간이에요. 공간 자체가 작품이지만 실제로 넘버링이 부여된 출품 작품은 단 두 점입니다. 잘 찾아보세요.
주방은 'Untitled (the studio)'로 명명된 아틀리에 공간으로 연결됩니다. 누가 봐도 아티스트를 연상시키는 인물 조각은 거울로 된 캔버스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죠. 거울 캔버스는 주변 모든 것을 반사하며 조각, 회화, 작품, 공간, 관람객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사진을 찍으려 다가가는 관람객은 의도치 않아도 작품의 일부가 됩니다.
재밌는 건, 엘름그린&드라그셋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예술가란 점이죠. 공간을 캔버스로 여기고, 공간 병형을 기본으로 공간의 규칙을 바꾸고 사람들의 행동방식도 바꾸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안에 만들어놓은 집 전체가, 수영장과 레스토랑 그 전체를 예술품이니,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고 하면 이해가 더 쉬울 듯합니다.
이 공간 벽면 작품은 고속도로 회화(Highway Paintings, 2018-2019) 연작입니다. 대표적인 산업 재료인 아스팔트를 직사각형의 캔버스 형태로 제작한 후 실제 도로 표식에 쓰이는 페인트를 활용한 작업이죠. 이번 전시에는 예전 한국 플라토 미술관이나 국제 갤러리 전시 때 출품됐던 작품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속도로 회화 연작이에요. 이전 두 전시를 보셨다면 익숙한 출품작도 있을 테니 잘 찾아보세요.
이 전시는, 관람객의 관람 태도에 따라 관람 시간이 정해집니다. 쓱~ 보고 나오면 30분도 안 걸리고요,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며 작가의 의도를 추측하다 보면 시간은 더 들고요. 영상실에서 재생되는 영상도 있으니 제대로 보고 나오겠다 싶으면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가셔야 해요.
어떻게 보셔도, 이 공간을 보고 온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폐막전에 꼭 보길 권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