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우발적 사고로 변화된 일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고'라는 단어가 품은 부정적 의미 그대로, 지난 두 달간 긍정적 사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행복'이란 녀석과 더디게 오는 '일상 회복'을 기다리고 있죠. 우울한 글이 될 것 같아 현재 상황을 먼저 공유하자면, 천천히 회복 중입니다. 곧 볕이 들겠죠.
예상했다면 사고라고 부르지도 않겠지만, 사고는 정말 우발적으로 찾아옵니다.
경위도 아주 단순해요. 자주 가던 산책길 바닥에 튀어나온 돌에 걸려 넘어진 거니. 당시 행동이 급했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누구와 얘기하면서 주변을 살피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앞만 보고 걸었는데, 익숙한 길이라 바닥을 눈여겨보지 못한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흙이 패여서 돌이 돌출된 건 아닌가 싶어요.
어쨌든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넘어진 찰나는 그대로 사라졌고, 다친 이후 상황만 기억납니다. 왼쪽 발목을 접질렸고 바닥에 제대로 쓸린 오른쪽 무릎에선 찢긴 바지 위로 피가 묻어났죠. 피를 봤으니 당연히 오른쪽 무릎을 더 다친 거라 생각하고 아픈 것보다 넘어진 게 창피해서 일어나려는데, 설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어지럼증도 찾아와 한동안 멍한 상태로 바닥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동안 발목은 퉁퉁 부어올랐고, 구조대와 119의 도움을 받아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응급실에서 만난 의료진 소견에 부러진 곳 없이 삐었나 보다 생각하고 주말 내내 반깁스 다리를 고정하고 얼음찜질하며 최대한 조심했는데, 휴일을 보내고 찾은 정형외과 검진 결과는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왼쪽 발목 골절에 전방 거비 인대 파열, 그리고 인대를 물고 떨어진 뼛조각 두 개"... 기본 4주 안정 및 가료 진단에 부기 빠진 이후 수술 여부 결정"...... 그날의 진단명입니다.
첫 진료 때 반깁스 한 다리를 땅에 딛고 절뚝거리며 걸어 들어갔는데, 나올 땐 왼쪽 발목을 바닥에 딛지 말라는 주치의 엄명에 한쪽 다리로 콩콩 뛰어나와, 당일 받은 목발에 의지해 위태위태하게 병원 복도를 벗어났어요. 예상치 못한 진단에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는데, 난생처음 써보는 목발 사용도 어려워,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위험했던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무게 중심을 잘 잡지 못해 휘청거리며 간신히 찾아간 약국에서도 난관은 이어졌죠. 아무리 오르려고 애써도 자꾸 뒷걸음질 치게 되는 약국 입국 경사로에 막혀 여러 번 시도 끝에 약국에 진입할 수 있었고, 데스크까지 목발을 짚을 엄두가 나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기대 있으니 약사님이 처방전을 받으러 가까이 오시더라고요. 경사로를 오르려 애쓴 수차례의 시도를 유리문을 통해 본 약사님은 시원한 에너지 음료와 함께 온화한 어조로 인사말을 건네셨는데, 별거 아닌 보통의 그 말이 그날 제 마음을 크게 울렸어요.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이른 아침에 병원에 도착해 진료받고 사진 찍고 약 찾고 하는 동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났고, 갑작스러운 목발 사용에 체력까지 금세 소진되어, 일단 쉬면서 정신을 좀 챙겨야겠단 생각으로 근처 밥집에 들어갔어요. 여기서도 극복해야 할 난관을 만났죠. 평소엔 인도보다 30여 센티미터 정도 낮은 도로도, 건물 앞 계단도 크게 의식 없이 지나쳤는데, 다치고 나니 이들은 만리장성보다 더 높은 장벽으로 다가왔어요. 그 일대엔 계단 없는 식당이 없었기에 결국 계단 수가 가장 적은 식당을 찾았고, 겨우 두 개의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지?'란 고민 끝에 '일단 기어오르자'란 생각으로 몸을 수그렸죠. 그때 누군가 힘 있게 저를 번쩍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식당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의 남자 사장님이 나오셔서 저를 일으켜 세운 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혀주셨고, 도움에 대한 조금의 생색도 불편한 내색도 없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셨어요. 제가 나올 때도 똑같이 보조해 주셨고요. 그 경험이 정말 감사해서, 치료를 시작한 두 달여 전부터 병원 근처에서 밥을 먹을 땐 꼭 이 식당에 갑니다. 약국도, 늘 그 집을 가고요.
집으로 돌아온 후 제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일주일 잘 쉬고 얼음찜질하면 되겠다 싶었던 예상은 '야무진 꿈'이 되었고, 앞으로 진행될 장기전을 위한 준비로 마음이 급해졌죠. 일과 학업은 급 중단됐고, 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꾸역꾸역 마무리 지은 후부턴, 깁스 상태로 딛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발을 심장보다 높이 들어 부기를 빼고 상처 부위에 얼음찜질하는 일이 일상 대부분을 대체했어요. 환자 모드에 맞게 주변을 세팅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맞이한 어이없는 상황이 처음에는 실감 나지 않아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고, 어쩌다 뭐라도 좀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효율 제로였죠. 발목과 함께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다리 색을 매일 마주하며 제 몸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많아졌거든요.
다쳤어도 집 안팎을 잘 다니는 경우도 있던데, 제 경우 주변 환경이 이동에 전혀 용이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손목이 약해 아대와 파스에 의존했던 터라 움직일수록 손해라는 판단이 빨리 서더라고요. 다행히 적당한 높이의 철제 스툴(stool) 이 있어 대부분의 실내 이동은 그 도움을 받았고, 가장 중요한 식사는 70대 노모의 몫이 되었죠. 환자를 위한 어떤 보조 장치도 안전장치도 없는 공간에서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씻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는 일은 난도가 상당해서, 최대한 움직임을 최소화했어요, 무리하다 더 다치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병원 외래 방문을 제외하곤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죠. 외래를 다녀오는 횟수가 늘어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어느새 마음으론 '수술'을 최종 목표 지점으로 설정한 채, 꼭 한 달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저 조차도 제가 이 답답함을 견딜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 못했는데,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태로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 힘듦을 너무 절절하게 체감하고 나니, 그 힘듦이 답답함을 제대로 눌러버리더라고요. 그렇게 각종 "포기"가 빨리 찾아왔고, 상황에 "납득"되었지만, 인생 처음으로 외부 접촉 없이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일들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나니,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해지더군요.
처음에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말에 많이 기댔어요. 다치고 나서 한두 주는 걱정을 해주는 이가 많더라고요. 또 그 위로와 걱정이 꽤 쓸모 있었고요. 근데 시간이 길어지니 그마저도 적어지거나 듣기 힘들어지더군요.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을 해야 하는 상황들도 잦아졌고, 위로인 듯 위로 아닌 말들에 마음 상하는 횟수도 늘었고요. 그래서 그즈음부턴 제게 힘을 주는 말들을 책에서 수집했습니다. 도서 판매 사이트를 보다가 제목이나 책 내용에서 제가 필요한 말이 담긴 구절을 발견하면, 바로 구매했어요. 소설, 에세이, 시, 전문서적, 외국어 관련 실용서까지 장르 무관하게 두 달간 20여 권 넘게 사니, 회원 등급도 올랐죠. 책 구매량과 독서량이 늘었다는 게 강제 휴가와 강제 칩거의 유일한 순기능이었달까.
제게 필요한 말이 어떤 땐 서두에, 어떤 땐 본문에, 어떤 땐 에필로그에 있었는데, 그 구절을 찾아가는 여정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더라고요. 읽다가 만난 좋은 구절은 따로 적어둬 충전이 필요할 때마다 펼쳐봤고요. 그렇게 읽은 책 중에 가장 제 마음 같았던 건 시인 유희경(1980~)의 『나와 오기』(2024, 난다)입니다. 제정신 건강에 큰 도움을 줬죠. 유희경 작가의 책은 최근 발행된 『천천히 와』(2025, 위즈덤하우스)까지 거의 다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위로받았다는 느낌을 짙게 받습니다. 신간 『천천히 와』에서도 편지, 답장, 선물, 혼잣말에 대한 에세이가 있는데, 딱 제 마음 같았어요. 일상의 말은 누구나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지만, 마음과 기분을 표현하는 말은 모국어라고 해도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많잖아요. 내 마음과 기분 상태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내려 해도 적절한 단어나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고요.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동안 나는 어린 나였고 손에 몽당 분필을 들고 있었다. 몽당 분필을 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되도록 큰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였다. 자 이제 안전해. 나는 선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고, 나의 허락이 없는 한 무엇도 선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어린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꽃과 벌과 개미.강아지와 고양이, 아빠와 엄마와 동생. 짝꿍. 집. 태권브이. 내가 아는 세계의 모든 단어는 그림이 되었다. 거기엔 기술도 관념도 작동하지 않았다. 닮음, 닮지 않음, 아름다움, 추함도 성립하지 않았다. 기준은 오직 나였다. 모든 것은 내가 명명한 만큼 생겨났고 내가 원하면 지워졌다. 해는 영영 저물지 않을 모양이었다. 친구 하나 없었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큰 사각형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 꿈에서 나는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었다.
유희경, 『나와 오기』 (2024, 난다) 중
<선에 대하여>, p35-36,
유희경 시인은 서울 유일의 시집 서점인 "위트앤시니컬"의 책방 주인이기도 합니다. 혜화동 소재 동양서점 2층에 서점이 있고,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을 통해 출근인사라는 형태로 다양한 시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동양서점은 역사학자이자 정치가로 활동한 고 이병도 박사(1989년 작고)의 딸이자 고 장욱진 화백(1917-1990)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가 1953년에 개점한 서점으로, 주인은 바뀌었지만 70여 년간 그 자리에서 영업 중이죠.
그 외에도 제게 위로를 준 책은 많습니다. 코미디 대부 이경규 님의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2025, 쌤앤파커스,) 김금희 작가 장편소설 『첫 여름, 완주』(2025, 무제),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해변의 스토브』(2025, 문학동네),앤드류 포터 소설 『사라진 것들』(2024, 문학동네), 김연수 작가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2022, 문학동네) 등등 신간도 있고 읽었던 책도 다시 읽었어요.
많은 구절들이 인상적이었지만,
우리가 무심코 주고받는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 그중 어떤 것은 우리의 생명줄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그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2025, 쌤앤파커스)
오늘 완평군에서 사연 보내주신 청취자분,
이런 말 무력하게 느껴져서 그렇지만 힘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첫 여름, 완주』(2025, 무제)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2019, 문학동네)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에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낸 그 길고 나른한 날들에서, 어쩌면 딴 생각을 하게 해줄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자신의 거실에 타인의 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도 오래 칼리와 함께 지냈기에 가끔 잊고는 했다.독신일 때는 그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가, 타인의 몸이,얘기를 나눌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사라진 것들』(2024, 문학동네)
와 같은 구절들을 여러 번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마음으로 되뇌었어요.
그리고, 다시 읽은 김연수 작가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2022, 문학동네)에선 이 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은정아, 인생 별거 아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다가 넘어지면 그만이야. 지금은 그거 연습하는 중이야. '
.......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윈드'라고 하더라고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2022, 문학동네) 중
<난주의 바다 앞에서> p.60
살다 보면 위로가 절실한 순간이 있죠. 하지만 정작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만큼 누군가의 위로를 받긴 어렵습니다, 각자 살아가야 할 다른 일상이 있으니까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생각보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에 능숙하지 않아 종종 기회를 흘려보내기도 하고요. 그러니,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들을 평소에 많이 발굴해 두길 권합니다. 그 대상이 대부분은 가까운 사람이겠지만, 자연, 반려동물, 공간, 음식, 노래, 영상, 책 등도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되어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