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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an 03. 2022

하면 안 되는 새해 인사

자격지심 심한 전업주부라서 미안해



2021년의 마지막 날 지인들과 한 해를 보내는 인사 문자를 주고받았다. 내용은 당연히 2021년을 무사히 보낸 것을 감사하고, 2022년에도 무사하고 무탈하게 보내길 바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가지 인사 중에 내 마음에 콕하고 가시처럼 박힌 인사가 있었다.

20여 년을 알고 지낸 지인이 보내온 문자였는데,

“올 한 해 동안 밥 한다고 고생 많았어. 내년에도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나쁜 의미는 하나도 없는 인사말이었는데, 자꾸 보게 되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우리는 작년 한 해 동안에도 꽤 자주 만났고, 대부분의 만남은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다. 외식도 마음껏 하기 힘든 시국이라, 나는 주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내가 밥을 좀 열심히 하긴 했다. 그래도 내가 한 해 동안 한 일 중에 가장 큰일이 밥 하는 일은 아니었는데, 그녀 눈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 문자를 보고, 2021년에 나를 대표하는 이 밥 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가 싶은 생각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밥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그녀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단지 허무함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그런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 들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줄곧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워킹맘이다. 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육아와 살림은 친정집에 살면서 친정어머니가 도맡아 주고 계신다.


헌신해 주시는 친정 어머니 덕분에 그녀는 식구들을 위해 결혼 17년 동안 밥상 한 번 차려 본 일이 없다. 외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친정 엄마가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밥 차리는 일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이고 품이 드는 일인지 겪어 본 사람이 '밥 챙긴다고 고생 많았다'고 했으면 괜찮다.


그녀는 언제나 바깥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고, 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고 나를 볼 때마다 울부짖듯 말했다. 밥을 차려 보지도 않고, 밥 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새해 인사로 밥 한다고 수고 많았다는 문자를 보내니, 내 마음에 곱게 와닿았을 리가 없다.

     

그 문자가 지금까지 그녀가 내게 했던 태도를 상기시켰다. 그녀는 은연중에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말을 자주 해 왔다. 집에서 공부방을 할 때도 나는 꽤나 바빴지만, 그녀가 왔을 때는 최선을 다해 밥을 했다. 그때도 그녀는 내가 밥 하는 것을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였다. 나도 일을 할 때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 것을 전혀 모르는 듯한 말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었다.


그녀 눈에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과 집에서 밥하는 사람으로, 세상 사람이 두 가지 부류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밥을 할 때, 그녀는 당연히 아무것도 못한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밥 하는 내 옆에서 회사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곤 했다. 언제나 화제는 본인의 회사와 회사 사람이야기 였다.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었다. 가끔은 서운한 적이 있기도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 집에 온 사람과 기분 좋게 밥을 먹고 싶어서, 괜히 고깝게 생각하지 말자고 넘어갔다. 무엇보다 나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르는 애매한 감정 때문에 인연 하나를 또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넘겨지지가 않는다. 노트북이 대나무 숲이라도 된 듯, 써 내야 내 속에 박힌 가시가 빠져나올 것 같다.  


나는 1년 동안 밥 챙긴다고 고생 많았지만, 다른 일도 많이 했다. 그녀가 그걸 모른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겠지만 알려 주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 외에는 중요한 일은 별로 없는 사람이니까. 이제 다시 만난다면 그녀를 위해 밥은 안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올 연말에는 그녀에게 다른 멋진 인사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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