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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Jun 08. 2021

기억하는 소설

왜 기억해야 하는 거죠?


창비에서 새책 출간을 앞두고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공고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하필 읽어야 할 책이 재해와 재난 사고를 다룬 소설이란 걸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난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 흐름은 조금 알아야겠다 싶어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핵심 브리핑 정도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다. 뉴스를 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뉴스를 보며 웃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사건, 사고를 다룬 기사는 그것이 크던 작던 일상에 불안을 가져오는 파장을 일으켰다. 부모님을 병원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후론 더 이상 <병원 24시> 같은 건 쳐다보고 싶지 않아 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애써 들여다볼 용기가 없어 신문기사조차도 외면했던 재해와 재난 사건을, 결국은 이렇게 소설로라도 들여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도망만 가지 말고 한 번쯤 마주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과의 인연도 그냥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이야기


그래도 다시 묻는다. 왜 기억해야 하냐고. 그러자 이 책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한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잊어버린다고,
봐라, 또 무너진다.



지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건들을 역사책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기억하는 세대와 함께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등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나조차도 아련한 기억으로 떠올리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들어본 적은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게 언제였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다. 기억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잊히는 게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것은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 행복을 잊지 않기 위해 반복 재생해야 하는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악순환을 겪지 않기 위해, 후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들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소설집은 반지하에 살던 나에게 2,3층 높은 곳으로 이사해 세상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다. 출판 시기와 작가가 각각 다른 총 8편의 단편소설을 '기억하는 소설'이란 테마로 묶었다. 외국의 재난 사고부터 시대를 달리하는 각각의 우리나라 재난 사고, 그리고 기후변화와 운석 충돌이라는 가상의 재난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재난 사고를 다룬 소설들은 내 안에 자리 잡은 이미지가 있어 첫 장을 펼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는데, 글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성하게 했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이유가 뭘까.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약하고 잔잔하지만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넌지시 건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사건의 시선을, 직접 겪은 이들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일 수 있고, 고통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 고통이 남긴 상처를 다루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경고의 메시지였기에 오히며 오늘날의 삶을 감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즉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이 책이 주는 힘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에겐 '각성과 자각'이었다.


이 세상엔 타인의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들은 평범하다 못해 더 소외된 사람들이고 힘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있어 세상엔 아직 희망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거라는 진실에 대한 자각.

매일 뭘 먹을까, 뭘 입을까, 어떻게 돈을 벌까 하는 고민을 내려놓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도라도 한 번 더 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기쁨을 느껴보라는 각성.


여덟 편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볼까 한다.


1. 재해지역 투어버스[강영숙, 창비 2011]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후일담을 배경으로 쓴 소설로, 재해지역 투어버스를 탄 한 관광객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허리케인으로 죽거나 피해를 받은 사람 대부분은 흑인 빈곤층이었고, 정부는 허리케인의 위험을 알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재난 이후 흑인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강압적으로 제압했다.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힘겹게 건뎌야 했던 재난 사고는 자연재해가 사회적 재난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구덩이[김숨, 창비 2014]

이 사건의 원인은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과 공장식 축사, 육식 위주의 식탁 문화 등에서 생각해볼 수 있지만 정작 해결은 임시방편인 '덮기' '묻기'의 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구덩이를 파서 '묻는' 방식이 마치 소설 속에서 남 씨의 부인이 수술하려 들어갔지만 결국 열었다가 그냥 '덮어버린' 것처럼 치료나 치유, 해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버리는 방식이었다.  돼지를 키우며 꿈을 꾸었던 농장 사람들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태어나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다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게 되는 돼지를 그냥 '묻기'는 절망과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3. 몰:mall:沒 [임성순, 은행나무 2019]

"막내야, 백화점이 왜 무너졌는지 아냐?"

만수 아저씨가 갑자기 물었다.

"부실 공사 때문에요?"

"아니야, 무너진 쇼핑몰을 쓰레기장에 버리는 놈들이 있는 나라니까, 그러니까 백화점이 무너지는 거야."

인과가 뒤바뀌어 있었지만 어쩐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라믄 뽀사진 건물은 어데다 버립니까? 쓰레기장에 버려야지."

"쓰레기장에 버리면, 흙으로 덮어 버릴 거 아니냐. 그러면 잊어버린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잊어버린다고, 봐라, 또 무너진다. 분명히 또 무너진다고."


삼풍백화점 사고의 잔해를 쓰레기장에 옮겨 흙으로 덮어버린 곳 난지도. 그곳에서 시신을 찾는 일을 하던 갓 제대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력사무실의 일자리를 얻어 일용직으로 일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과 경찰들이 가라는 곳으로 일하러 갔는데, 그곳은 삼풍백화점의 잔해를 실어다 놓고 그곳에서 시신을 찾는 일을 하게 된다. 난시청 지역에 살아 TV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데다 철거를 앞두고 있었기에 그 사건을 먼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누이의 손 같은 느낌의 시신의 손을 발견한다. 있지도 않은 온기를 느끼를 느끼며, 살아있을 당시의 죽은 이를 떠올린다. 상고를 졸업하고 얻은 직장에서 하루 아홉 시간을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겠다며 꿈을 좇던 누이 같은 사람을.

그 백화점 회장이나 부자들 중 그 사고에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목숨도 재산도 다 챙기고 도망간 회장과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하던 일을 계속하던 직원과 시민들은 죽고, 그 건물의 잔해 속에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건 결국 또 다른 일용직 근로자인 세상. 지금은 달라졌을까?


4. 미카엘라[최은영, 문학동네 2016]

세월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세월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이웃으로 둔 이들의 시선에서 다루고 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머니의 자화상 같은 미카엘라의 어머니는, 타인의 고통을 깊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교황이 직접 하는 미사를 보겠다며 서울로 올라온 것이 두 번, 한 번은 89년이고 또 한 번은 세월호 사건이 있은 2014년이다. 딸 집에 갈 수도 있으나 행여 방해가 될까 봐 찜질방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할머니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천막이 펼쳐진 곳에 가게 된다. 할머니가 어려서부터 보고 아껴주던 이웃의 손녀가 죽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죽은 그 손녀의 어머니를 찾아 서울 광화문까지 오게 된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그토록 아꼈던 이웃집 손녀의 이름은 미카엘라. 그녀의 딸과 같은 세례명이다. 그 순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손녀는 남이 아니게 된다. 또한 그녀의 딸은 뉴스에서 우연히 광화문에 사람들 틈에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그곳엔 엄마와 같은 옷차림, 가방을 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렇게 엄마와 같은 엄마들이 그곳에 있다. 모두가 우리의 딸이고 엄마일 수 있다는 깨달음과 우리 모두는 결국 누군가와 다 연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다시 얻는다. 그래서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는 것이겠지.


5. 하나의 숨[조해진, 문학과지성사 2021]

하나는 특성화고 학생으로 현장실습이란 이름으로 취업한 모 회사에 다니고 있고, 주인공 선생님은 계약직 교사로 하나의 담임이었다. 하나가 다시 학교에 돌아갈 수 없냐고 전화했을 때 그녀는 의례적인 태도로 타일러야 했다.

"남의 돈 받는 게 원래 쉽지 않다, 그건 남들도 다 똑같아."

"하나야, 좀 참아봐."

그녀 또한 2개월 남은 기간제 교사였기에.

그리고 얼마 후, 어떤 일로 하나가 공장 3층에서 뛰어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공장에서 하나가 모멸감을 느끼고 더 이상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꿀 수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하나가 정말로 뛰어내린 건지는 알 수 없다. 공장 관계자는 사건을 은폐하고, 하나를 그곳으로 보낸 학교도 침묵했고, 당사자인 하나는 중환자실에서 숨만 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사건은 힘없는 어머니만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어야 할까. 하나의 담임이었던 그녀도 자기 코가 석자라 외면하고도 싶었으나, 도시에 나타난 갈매기를 보며 무언가 결심한다. 바다가 아닌 도시에 나타난 갈매기처럼 꿈과 현실의 그 어디쯤에 있을 법한 갈매기를, 어쩌면 하나는 본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다 진실이 아니어도 행복한 꿈꾸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진짜이고 싶었던 하나의 숨은, 중환자실에서 끊어지지 않는 숨으로 쉬어지고 있다고. 그 숨과 자신의 숨은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6. 방[강화길, 문학동네 2016]

수연과 재인은 큰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온다. 공장에서 일하며 서너 명이 같은 방을 써야 하는 곳에서 생활하는 수연과 반지하 고시원에서 작은 소리로 전화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재인, 둘은 인간의 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둘은 함께 살 멋진 집-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밝은 곳-에 살 계획을 갖고, 정부에서 제공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것이다. 파괴된 도시의 잔해를 치우는 일이었다. 그 일은 평소보다 5배 이상은 더 벌 수 있어서 함께 살 행복한 집을 얻기 위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2년 정도 열심히 일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도시에 와서 간신히 얻은 곳은 곰팡이 가득하고 석회 섞인 물이 나오는 옥탑방. 그 집과 도시에 살면서 수연과 재인은 점점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간다. 수연은 처음에는 두 다리가 건물 기둥처럼 크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돌덩이처럼 굳다가 나중에는 가슴과 얼굴까지 석회가루로 뒤덮이는 듯하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재인은 손가락 통증이 점점 심해지더니 손가락이 반으로 쩍 갈라질 지경에 이른다. 수연과 재인은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며 꿈꾸던 집을 얻을 만큼의 돈을 모았지만, 도시는 봉쇄령이 내려지고 둘은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으로 전기가 끊긴 집에서 잠이 든다.


7. 슬(膝)[박민규, 창비 2010]

이 작품의 배경은 BC 17000년, 현재의 함경남도 이원 철산 지역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한다. 기후는 온통 눈뿐인 곳에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곳을 떠났거나 죽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떠날 수 없었던 우는 부인과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애를 쓰지만 계속되는 빙하 속에서 이제는 먹을 것이 모두 동이 난 상태다. 잘려나간 손톱도 아작아작 먹어야 할 만큼 무엇이든 씹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새끼에게 줄 젖은 말라버렸다. 우는 마지막 힘을 내어 마지막 사냥에 나서는데, 우처럼 먹지 못한 늙은 코끼리를 만난다. 우는 코끼리를 잡기 위해, 코끼리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바위틈에 끼어버린 우는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바위틈에 낀 자신의 발목을 잘라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기다릴 아내와 새끼에게 먹일 고기를 들고.

먹을 것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던 나는 갑자기 굶주림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생소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처럼 그런 상황에 놓이지 말라 법은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고귀한 축복인지 깨닫게 된다.  자유라는 건, 생존 앞에서 소용없는 물건이다.


8. 어느 날(feat, 돌멩이)[최진영, 민음사 2019]

운석 충돌로 지구가 멸망 위기에 놓였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을 때 주인공은 카드 고객 센터 상담원과 통화 중이었다. 일시불로 결제한 것을 할부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전화는 중간에 자꾸 중단이 되고, 지구와 운석 충돌 기사는 계속해서 보도된다. 엄마는 주인공에서 전화를 걸어 뉴스 내용에 대해 묻는다. 어릴 때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고, 결혼해서는 가족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시며 사는 엄마에게 지구나 행성, 우주 같은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에 뉴스 보도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고 엄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 엄마에게 설명해보지만 자신 또한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하루의 일상은 공모전에 낼 이야기를 생각하고,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문의가 제대로 해결됐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주인공은 왜 그토록 지구의 멸망 소식을 듣고도 아무 소용없을 그 행위를 반복해서 하는 걸까 의심이 들 정도로 일상에 집착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엄마의 전화. 돌멩이 하나가 가져올 지구의 멸망 앞에 무력한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버텨보고 살아보려 한다. 해답은 없지만 주인공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우리가 어떻게 되면 좋겠어?

"글쎄, 이제 와서는 사는 건 모르겠고..... 그래도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 죽으면 좋겠다. 네가 오든가 내가 가든가 최대한 가까운 데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가슴 아픈 사건 사고를 많이 접한다.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코로나 19도, 해마다 겪는 구제역 사건,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침몰, 온갖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로 겪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인권유린, 아동학대와 살인 등 단어조차 떠올리기 괴로운 사건들이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크던 작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묻곤 한다. 

그래도 웃으며 살 수 있니?라고.

산 사람은 산 사람만의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지는 게 이치라, 산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몫으로, 무게로 또 삶을 견디어낸다. 그래서 다시 웃고 또 웃지만, 그 웃음 끝엔 이상하리만치 헛헛한 쓴웃음이 뒤따라온다. 슬픔이 뭔지 알아버린 사람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더는 갖지 못할 듯싶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건 사고를 겪은 가족들이 이웃으로 함께 사는 세상이 현실이지 않은가. 


사실 타인의 사고와 불행에 눈물을 흘리고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내가 아직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그것이 곧 내 일이 될 거 같으면 피하게 된다. 본능에 가까운 자기 방어다.


그런데 <미카엘라>란 작품을 읽으며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완전히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 껴안게 되는 것 같다고. 타인의 고통도 나의 고통도. 더 이상 그 안에 두려움이나 불안보다는 그저 슬픔만이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고. 언제 빛이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으면 희망의 빛은 언젠가 올 거라고. 다만 희망이 빛이 온다는 걸 유지하는 힘이 부족할 뿐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재난이나 재해의 아픈 기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발견한 희망의 빛'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  이병률 [눈물이 온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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