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타자기를 구입한 지 서너 달 만에 나는 총 4대의 타자기를 소장하게 되었다.
영문타자기 3대, 한글 타자기 1대. 영문타자기를 여러 대 구입한 이유는 첫 타자기 구입 시 7살이었던 첫째가 타자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집콕하는 동안 아이는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내가 영문타자기로 열심히 타이핑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고 싶어 하더니 자연스럽게 영어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모양을 완벽히 외우게 되었다.
타자기의 순기능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검지손가락으로 겨우겨우 알파벳 자판을 누르던 아이는 독수리 타법이지만 제법 속도를 내며 책을 타이핑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누나가 하는 일은 뭐든지 따라 하는 둘째도 합류하여 귀여운 투샷을 보여주기도 했다.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온전히 내 생각)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어와 친해지는 것,
그리고 아이들과 공통의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디지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새로운 즐거움도 찾고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다니! 나는 더욱 타자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과 집안일 사이사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타이핑하기도 하고 소장 중인 소설 한 페이지를 치는 동안의 내 모습은 엄마나 주부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온전한 모습의 나'가 되는 것 같아 더 좋았다.
열심히 타이핑하던 생활 중 무언가 새로운 글들을 타이핑하고 싶어 졌을 때 초등학생이 된 첫째의 글이 보였다. 좋아하던 동화 속 곰이 서커스에서 우승컵 받은 이야기와 놀이터에서 놀다 날벌레 만난 이야기가 뒤섞여있는 그냥 마구 쓴 글에도 멋져 보이는 문장이 보였다.
어쩐지 나의 삶... 까지는 생각을 안 해도 된다. 몇 가지 일은 좋은 일뿐이다.
철학적으로 느껴지는 이 문장! 깊게 고민할 필요 없고, 기억에 남는 건 좋은 일들 뿐이라고. 아이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뒤로 나는 아이의 작문이나 숙제 속의 글들을 타이핑했다. 그러다 보면 그 속에서 깜짝 놀랄만한 문장들을 발견할 때도 있어서 즐거웠다. 예방접종 후 울지 않았던 용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글에서 나온 이 문장도 멋졌다.
나는 용감함과 함께 자랄 것이다.
타자기의 또 다른 순기능이 발견되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글이라도 정성껏 타이핑하며 다시 읽고 또 생각했더니 새롭게 읽혔다.
내가, 우리가 쓰고 싶을 때 타자기를 꺼내기 쉽게 주방 수납장 한편을 비워 타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타자기를 수납할 곳이 정해지자 수집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작은 것뿐만 아니라 예쁜 것이 필요했다. 다음타자기는 무조건 예쁜 것으로, 제일 예쁜 타자기로 사야겠다 마음먹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이미 점찍어둔 타자기가 있었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아직도 애용한다는 그 타자기! 수동타자기 수집가라면 적어도 한 번은 갖게 되는 그 타자기였다.
OLIVETTI VALENTINE
이탈리아 브랜드인 올리베티 사의 밸런타인 타자기였다.
이 예쁜 타자기는 이름표를 붙이고 왔는데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기억도 함께 받은 것 같아서 좋았다.
아키히코 씨 반가워요~ 나도 이 타자기와 즐거운 시간 보낼게요!
이미 갖고 있는 4대의 타자기보다 비싼 이 타자기를 구입함으로써 타자기 치는 취미에서 타자기 수집의 세계로 한 계단 올라가고 말았다. 이제는 작고 수납이 편한 것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에 눈 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