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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Feb 01. 2024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혼자 여행 좀 다녀올게요

"나 여행 갈래."

"어디로?"

"남미."

"누구랑?"

"나 혼자."


순간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남미?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왜 하필 남미야.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지금 아니면 못 가." 


내 나이 서른셋. 지금 아니면 못 간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남편도 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남미는..."

나는 어버버 거리는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행 자금은 두둑이 마련해 뒀어. 욕심부리지 않고 마추픽추랑 우유니만 보고 올게. 그곳은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별일 없을 거야. 하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야간버스 대신 항공으로만 이동할 거고, 택시는 우버만 탈게. 긴급상황에 대처할 있도록 24시간 프런트 데스크가 있는 호텔에 묵을 거야."


남편은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찬 나의 태도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여행 자금은 매달 들어오는 부동산 월세와 동화책을 내서 벌어들인 인세만으로도 넉넉했고, 안전 수칙을 지켜가며 유명 관광지만 보고 오겠다는 계획도 나름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나를 막을 핑계를 찾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하려고? 스페인어 할 줄 모르잖아!"

"응~ 스페인어 하루에 두 시간씩 공부했어. 나 듀오링고 스페인어 랭킹 1위야."

"가다가 납치당하면 어쩌려고?"

"응~ 그런 일 없도록 대중교통은 일절 안 탄다니까~ 비행기랑 우버만 탈 거야~ 모아둔 돈 많아."

"갑자기 아프면 어떡해!"

"응~ 여행자 보험 제일 비싼 걸로 들게. 너무 아프면 비행기표 바꿔서 귀국하면 돼~"   

더 이상의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은 태세를 바꿔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유럽에 다녀오면 안 돼? 실컷 보내 줄게."

"응~ 유럽은 이미 마스터했어. 이제 안 가고 싶어. 내가 가고싶은 곳은 남미라고."

남편은 기세에 밀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토론에서 승리한 나는 자유 한국인으로서 시원하게 남미행 비행기표를 결제해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방어하기 버겁다고 느꼈던지 나의 여행 계획을 동네방네 소문내기 시작했다. 

"여러분! 제 와이프가 혼자 남미에 간다고 합니다!"

남편은 주변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 나의 원대한 여행 계획을 전했다. 혀를 끌끌 차며 따가운 한마디를 던지길 은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모두 남의 여행 계획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제수씨가 혼자 대단하네!'라고 말했을 뿐이다. 


남편은 이에 질세라 친정 부모님께도 나의 여행 계획을 폭로했다.

"장인어른, 장모님! 와이프가 혼자 남미에 간답니다. 한마디 해주시죠."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허허 웃으며 대답하셨다.

"여행? 힐링하고 좋지. 우리가 붙잡는다고 해서 안 갈 애도 아니고. 잘 다녀오라고 전해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부모님께 패키지여행을 보내드린 보람이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효도하는 딸에게 역정을 내실 분들이 아니었다. 



모든 예상이 빗나가자 씩씩거리던 남편은 결국 시누이에게까지 전화해 모든 것을 일러바쳤다. 

 "누나, 있잖아. 와이프가 혼자 남미에 가겠대!!"

나는 찌릿하고 남편을 흘겨보았다. 남편은 눈썹을 들썩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시누가 뭐라고 할지 무서웠다. 아침 드라마 대사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혼자 여행 가면 밥은 누가 챙기고?'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누구는 룰루랄라 여행 간다고?'

'결혼한 여자가 혼자 여행 간다는 게 말이 돼?'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며 담요를 뒤집어썼다.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들려오는 남편과 시누이의 대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나, 와이프한테 가지 말라고 한마디 해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누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누는 남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동생아, 네가 같이 가줄 수 없다면 보내줘."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담요를 벗어던졌다.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나,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같이 가줄 수 없다면 보내주라고."

"응... 알았어.... 누나."

남편은 본전도 건지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불렀다. 

"야호! 역시 시누이는 내편이야!!"

 

나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나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남편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인정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족들과 쌓아온 신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가고 싶었던 그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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