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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Mar 10. 2024

[소설] 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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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카페야?

- 응


‘나 복도에 갇혔어.’ B는 이 문장이 부적절한 친밀함을 담고 있다는 걸 곧장 깨닫는다. ‘미안, 도어락이 잠겼’ 아, 이것도 안 되려나. ‘미안, 퇴근이 늦어져서. 금방 갈게.’


- 퇴근이 늦어진다 미안

- 알았어. 천천히 와.


B는 마침표까지 다 찍힌 K의 메시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현관문에 머리를 갖다 박는다. 놀란 복도 센서 등이 불을 밝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B는 한 번 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이미 서른 번도 더 해본 짓거리지만 이번만은 다른 결괏값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비장하게, 이구이오. 띠리릭, 도어락은 맞는 비밀번호라고 소리를 내면서도 문은 열어주지 않는다. 같은 짓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는 건 정신병이라고 하던가. B는 터덜터덜 편의점으로 걸어가며 자신이 미쳤을 가능성에 대해 타진해 본다. 천천히 오라던 K의 메시지가 다정해 보이는 걸로 보아 가능성이 없진 않다.


29일과 25일. B와 K의 생일이다. B는 여전히 현관 비밀번호를 바꿀 마음이 들지 않는다. K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태연하게 집에 들어오는 상상을 하며 잠든 지 2주가 지나고 있다. 집에 남은 K의 물건을 챙겨주기로 한 날 도어락이 고장난 건 운명일 지도 모른다.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니라는 계시 같은 거 아닐까. B는 자신에게 이런 십 대 소녀 같은 감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9볼트 건전지. 네모나게 생긴 이 건전지는 도무지 쓸 데가 없다. 방전된 도어락을 일시 회복시킵니다. 그 외에 다른 능력이 없는 아이템이다. 도어락이 고장날 걸 대비해서 9볼트 건전지를 매번 챙겨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씩 비싼 돈을 주고 사서는 방 한구석에 처박히는 게 9볼트 건전지다. 이 얼마나 잉여로운 에너지인지. B는 혹시 몰라 각기 다른 브랜드로 두 개의 건전지를 산다. 얼른 K에게 가야 한다.


문이 안 열린다. 대체 왜. B는 이제 식은땀이 흐른다. 수리 기사님께 연락을 하니 오는 데에 30분은 걸린단다. “네,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다.


정말로 30분 후 도착한 기사님은 B가 가진 것과 같은 9볼트 건전지를 도어락에 대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선생님 제가 계속 해봤는데 안 됩니다 그거. B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정장을 입고 현관문이 안 열린다고 우는 서른 살의 여자는 너무 무섭지 않나 싶어 그만둔다. 그래도 역시 전문가다. 두어 번 시도하시고는 곧바로 포기하신다. “이거 아예 수명이 다 된 거 같은데요. 그냥 떼야겠어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B의 시선이 휴대폰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도어락이 보통 15년쯤 쓰면 수명이 끝나요. 잘 모르는데 이것도 소모품입니다.” 요란한 전동드릴 소음 사이로 기사님의 씩씩한 목소리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도어락을 떼어내자 동그란 구멍이 드러난다. K의 물건들을 담은 박스가 구멍 안으로 보인다. K에게선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기사님은 현관문을 열어주시며 도어락을 새 걸로 바꿀 거냐고 묻는다. 저렴한 것도 있고, 새로 나온 모델도 있단다. B는 손에 쥔 9볼트 건전지를 식탁에 내려놓는다. 사용할 곳 없는 잉여 에너지. 남았긴 해도 쓸 곳은 없다. B는 K에게 문자를 보낸다.


- 아직 카페야?

- 응


빠른 답장. B는 기사님께 새로 나온 모델로 설치를 부탁드린다. 비밀번호는, 우선 원래 번호로 해주세요. B는 K의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아, 건전지가 방전되는 데 얼마나 걸리더라. 








Fin.


간만에 글모임 다녀왔다.

글제: 건전지

제한 시간: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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