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손자가 집에 왔다.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온 계절은 급행열차라도 탄 듯 순식간에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서둘러 챙겨 온 옷들 사이로 시린 몸을 감쌀 것이 없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유아복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주가 키도 자라고 덩치도 커진 것을 새삼 느끼며, 품이 넉넉한 옷을 고르게 되었다. 오래된 습관이다. 옛날처럼 물자가 귀한 시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두 치수 큰 옷을 고르는 나를 보며, 문득 모든 것을 나눠주던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이 떠올랐다.
칡덩굴이 그러했다. 마치 여백을 허락하는 듯, 자신의 자리를 굳이 고집하지 않고 이웃한 나무들에 의지하며 제 삶의 터전을 넓혀가고 있었다. 벚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할 것 없이, 그 어느 곳에도 스스럼없이 몸을 걸쳐 가을 햇살을 반사하며 빛난다. 이토록 여러 나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칡덩굴은 그 자체로 넉넉한 생명이다. 어머니의 품성이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만의사 주차장 앞 냇가 주변까지 칡덩굴이 휘감아 있다. 닿는 곳마다 스며들며,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인 양 짙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조금은 고집스러우면서도 너른 마음으로 주변을 포용하는 그 모습을 보며,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가진 소유욕과 경계 짓기의 얄팍함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세상에 우리 자신을 덧붙이는 대신, 소유하려 애쓰며 그토록 많은 경계를 세우기 시작했을까.
멀리서 보니 생강나무의 잎이 가을을 온몸으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붉게 물든 잎은 한층 더 진해져 진분홍빛을 띄며, 가을을 수용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곁에도 칡덩굴이 덩그러니 기대어 있었다.
칡덩굴은 여유롭고 부지런했다. 어느새 길 건너편까지 뻗어나가며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넉넉하고 넉살 좋은 그 모습은 시장 아줌마의 인심을 떠올리게 했다. 칡덩굴은 그저 모든 것을 품으며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겉으론 거칠고 무성해 보여도, 그 안엔 넉넉함과 포용력이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천성이지만, 쉽게 지니지 못하는 여유와 관대함을 칡덩굴은 자연스레 지니고 있었다. 붉게 물든 그 잎은 공간을 공유하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힘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부러움과 함께, 잃어버린 여유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가르침이 아닐까. 자기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주변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나 역시 배우고 싶어졌다.
칡덩굴의 넉넉함은 삶이란 서로를 받아들이며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임을 일깨운다. 우리는 종종 경계를 지어 스스로를 가둔다. 그러나 칡덩굴처럼 다른 이들을 포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여유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 자연의 이치는 우리에게 여유를 찾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라고 일러준다.
칡덩굴은 그저 뻗어나가며 존재의 여유를 즐긴다. 그 모습은 불필요한 소유와 경계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자유를 상기시킨다. 그는 소박한 겉모습에 진정한 힘을 담고 있으며,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타자와의 조화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다.
결국, 칡덩굴은 우리에게 소유가 아닌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자연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삶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갈망하는 진정한 여유일 것이다. 칡덩굴의 너른 마음은 자연의 법칙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투박하지만 후덕하고 넉넉한 엄마, 광을 열어 놓고 사셨던 그 세월이 그리운 요즘이다. 퍽퍽하고 궁핍한 경제환경에서도 맘만은 언제나 부자스럽게 살게 해 주신 그녀
광이 차고 넘쳐도 더 채우기에 급급한 요즘의 찌든 세상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칡넝쿨이 내가 마음 부자의 길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