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씩,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내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착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현상이 빈번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의 시야가 자기중심적으로 좁아지기 쉬워서일까?
육체와 정신의 변화는 우리의 시각을 점점 좁히고, 그 좁아진 시각 안에서 나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나의 경험과 고통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런 생각이 쌓이면 결국 내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종종 보이는 '노인의 자기중심적 대화'는 바로 이러한 오해와 좁아진 시각에서 비롯된다. 노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나온 세월과 고통을 자랑하며,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것이 그들에게 삶의 가치를 증명할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들의 대화는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들의 고통과 경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꼰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나이 든 사람들의 조언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에서 그치는 걸까? 젊은 세대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때는 그랬으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라는 조언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 쉽다. 물론 나이 든 사람들의 경험은 시대를 살아온 값진 지혜를 담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과 경험만을 기준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들은 결국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흔히 '내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가? 이러한 사고는 나이가 든 이들에게 더 흔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중심으로 타인의 고통을 가늠하며, 때로는 젊은 세대의 고통을 사소하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그 고통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더 고통받고 있는지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인정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고립된 삶으로 이어진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과 연결될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내 고통만이 크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좁은 시야에 가두는가? 이제는 ‘우리의 고통’을 함께 바라보는 넓은 시각이 필요한 때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이와 상관없이 고통은 각자의 삶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결국, “내 고통이 가장 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과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