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부터 가끔 눈 주위가 콕콕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별다른 증상 없이 사라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최근 통증이 잦아져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상포진일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건강을 자신했던 내가 이토록 무신경했음을 깨닫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젊었을 땐 조금 아파도 회복이 빨랐지만, 지금은 다르다. 병원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단순히 건강 걱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관리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그 무게를 더했다.
노년은 젊은 시절과 다르다. 젊었을 때는 시간과 에너지라는 무한한 자원이 있다고 믿었다. 조금 더 미뤄도, 조금 덜 신경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언젠가는’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몸은 더디게 회복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짊어지고, 앞으로의 시간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책임을 더한다. 젊은 시절, 그 무게는 타인과의 경쟁이나 사회적 성취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년에는 그 무게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스스로에게 향한다.
젊었을 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노년엔 ‘어떤 모습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자기관리나 성취를 넘어, 삶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젊은 시절의 엄격함은 대개 외부를 향한 것이었다. ‘남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사회에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불안이 우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외부의 평가나 타인의 시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내면에 있다. 젊었을 때의 엄격함이 타인과의 경쟁을 위한 것이었다면, 노년의 엄격함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돌보며,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고, 남은 시간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더욱 성실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규율을 넘어, 삶의 마지막까지 어떻게 완성해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요구한다.
박완서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반추하며 현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녀는 과거를 단순히 추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거를 발판 삼아, 현재를 새롭게 살아갈 동력을 찾아낸다.
박완서작가의 글은 노년의 삶을 관조가 아니라, 창조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노년에도 여전히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노년의 엄격함이 주는 진정한 선물이다.
엄격함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고민하게 한다. 더 이상 외부의 평가나 경쟁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내 몸을 살피고, 마음을 보듬으며, 지나온 시간을 품되 현재에 머무는 것. 이것이 노년의 자기관리다. 철학자 루소는 말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존재하기 위해, 두 번째는 살아가기 위해.” 노년의 엄격함은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삶의 두 번째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온종일 몸을 방치한 채 머리만 쓰거나, 반대로 몸만 관리하며 내면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균형을 잃은 삶이다. 치매나 만성질환 같은 노년의 위험 앞에서, 젊을 때보다 더 엄격한 자기 관리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엄격함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고 완성하기 위한 도구다. 노년의 삶은 과거를 품고 현재를 충실히 살며,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남은 시간은 더 짧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길 가능성은 무한하다. 노년의 엄격함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까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