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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희 Aug 17. 2020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형식이라 좁밥일  알았는데 일주일을 읽었다. 조지 오웰은 유명 소설작가일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문사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여러 신문사나 잡지에 칼럼과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나는  쓰는가>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했던 오웰의 다량의  중에서 스물 아홉 편의 에세이를 엮어 출간한 책이다.

책의 서두부터 말미까지 공통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바가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정치 ‘글쓰기. 어느 정도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동물농장>부터 <1984> 이르기까지 누가 읽던간에 글에 정치적인 비판과 풍자가 물씬함을 알아챌  있다.(다만 오웰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옳지 않다. 오웰은 철저하게 ‘전체주의 맞선 글쓰기를 했으며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혔다.) 그는 문학이라는 것도 정치와 전혀 별개일 수는 없다고, 날카로운 비판이 지식인의 소명임을 주장한다.

에세이들을 읽으며 그가 훌륭한 작가이자 굉장한 수필가라고 느낄  밖에 없다.  많은 글들의 방점이  곳에 찍혀있기 때문인데, 여러 편의 완성도 높은 글이 뚜렷하고도 일관된 방향성을 갖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일생 전반이 양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걸쳐 있단 것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각종 정치이념, 거짓선동, 투쟁이 가득한 비릿한 시대에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1936년부터 내가  심각한 작품은 어느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들이다. … …  작업들을 돌이켜 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나는  쓰는가>

안정한 지금의 시선으론 다소 비약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사실 같다. (넓은 의미에서)정치적인 책들이 모두 좋은 책들은 아니었지만 거지발싸개 같다고 생각한 책들은 어김없이 정치적이지 않은 책들이었다. 때문에 에세이 대부분에 정치적인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생전 처음 보는 단어와 개념들이 많아서 공을 들여 집중하고 읽어야만 했다.

 비판적인 시선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나의 나라 너의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 그가 본인의 조국인 영국에 대해 비판한 글을 보면 얼마나 맹렬하고 냉소적인지 웃음이 나기 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분별한 비난이 아닌 논리적이며 정제된 비판이다.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임을 고백한다. 게다가 그는 어쨌든 문학작가이다. 수록된 <두꺼비 단상>, <물속의 >, <시와 마이크> 같은 글들을 보건대 그가 과학이나 자연과 미학적인 측면에서의 문학과 일련의 애틋한 감정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음도   있다.

오웰을 읽으며 글쓰는 스타일에 대해 반추하게 됐다. 나는 글로  벌어 먹는 사람이  것도 아니거니와 전공도 그것과 하등 관계없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종종 글을 쓴다. 예전에는 화려한 미사여구와 다양하고 색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어쩌면 현학적인 문장들을 선망했다. 지금은 깔끔하고 냉철하고 비판적인 글을 동경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완전하게 옳든 그르든 간에 확고한 나의 관점을 갖는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엔 모호함이 아닌 단호함이 필요하다. 일종의 분노하고 설득하는 글이 좋다고  수도 있겠다. 싫어하는게 많고, 이해할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만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라고 안나 카레니나도 말하지 않는가. 슬픔과 좆같음은 무수한 글감이 된다. (좋은 일인지 슬픈 일인지)세상은 슬픔과 좆같음으로 가득하다.

내가 끄적거리는 많지 않은 글들이 고작 공개적인 일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자못 창피하다. 그럼에도 짤막하게라도  갈기는 이유는 춤을     되는 동작을 연습하듯 잘하고 싶은 것에 대한 얼마간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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