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주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을 하게 되면 꼭 아침밥을 드시곤 하셨다. 그동안 할머니는 아빠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고, 친엄마에 대한 원망을 자주 쏟아내시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하시곤 했다. 친엄마는 아빠의 아침을 챙겨주지 않았고, 아빠는 배를 곪고 직장을 다니셨다는 것이 내가 들은 바의 전부였다.
나는 당연히 그런 줄로 알고 살아왔고 친엄마 또한 원망하며 산 세월이 10년이다. 그러나 새엄마는 아빠에게 계란찜이 들어간 따뜻한 아침을 차려주곤 하였다. 그 모습이 열한 살의 내 눈에 얼마나 좋았는지 아빠가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곤 행복해하곤 했다.
아빠는 주간 근무에 일찍 출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 아침을 드셨고, 나는 아빠가 남기고 가신 밥을 먹고는 했다. 처음에는 나도 아침을 먹을 수 있었고 저녁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저녁은 식탁 불이 꺼진 식탁에서의 몹시 어두운 저녁이었다.
저녁 학원을 다녀오면 일단 집에서만 입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그 옷으 마치 걸레처럼 후줄근했고 찢어진 곳도 있었다. 옷이 그렇게 추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 옷을 입고, 음식물을 버려야 한다.
그때 키는 놀이동산에 있는 큰 놀이동산을 키미달로 못 탔을 때였기 때문에 138cm 정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언제나 키가 제일 작았기 때문에 앞자리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작은 키로, 발판 하나 없는 1미터 높이의 음식물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그 과정이 작은 키 때문에 몹시 싫었고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기분 탓인지 사람들이 신데렐라처럼 후줄근한 옷을 입은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불안해서 가장 꼭대기 층인 우리 집까지 걸어서 올라간 적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물건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새엄마가 시킨 적이 있는데, 하필 같은 반 친구였던 이동규와 마주쳐서 몹시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 꽤 인기가 많은 남학생이었고, 나는 그 아이의 시원한 성격을 좋아했다. 하필 같은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살고 있었는데 도저히 걸레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피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주황색 통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면 돌아오는 한 마디가 있다.
"네 방에 들어가라."
그때 유행하던 연속극 인어아가씨가 있었는데, 나 또한 할머니와 함께 연속극을 보거나 뉴스를 보던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인어아가씨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새엄마는 나와 함께 한 대의 tv로 같이 드라마를 보는 것을 싫어했고 싫어하는 티를 흘기는 눈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그 눈이 무서워 냉장고 앞에서 잠깐 서서 보다가 얼른 방에 들어가곤 했다.
내 방은 새로 3.5미터, 가로 3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그 공간이 유일하게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고 새엄마가 문을 벌컥 열어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오로지 내가 편안한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때로는 무서운 장소로 변하기도 하는 방이었지만, 적어도 혼자 있을 때 슬픈 책 한 권을 읽기에 가장 적합하고 안정된 곳이었다.
처음에는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차려주었기 때문에 얻어먹었지만 아직도 잘 먹지 못하는 반찬인 해초 반찬이 나올 때 나는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새엄마는 질색을 했고 반찬을 남기면 체벌을 하곤 했다. 무거운 원목식탁의자를 1시간가량 들고 서있어야 했는데 팔이 빠지는 줄 알았고 언제나 힘들었다. 그러다 구세주인 아빠가 돌아오시면 새엄마는 체벌을 멈추곤 했다.
"빨리 내려놓고 네 방에 들어가라."
내가 혼나는 모습을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모습마저 보여줄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내가 받는 고통을 아빠만큼은 알아주었으면 했지만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나는 새엄마와 숨 막히는 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들이 여러 번 있고 난 이후 아침 7시 넘어 겨우 눈을 뜨면 온수가 나오지 않는 욕조안의 물을 퍼서 머리를 대충 감고, 말리지도 못한 채 7시 30분이 되기도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반에서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했던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나를 반겨주는 한 식물이 늘 친구가 되어주었다.
11살에 나는 학교에서 수선화를 키우곤 했다. 예쁜 화병에 담긴 수선화였는데 참 예뻤고, 수선화 보는 낙으로 학교를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새엄마의 눈을 피해 집안에서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다녔고, 아빠가 계시는 주에는 그나마 당당하게 발 뒤꿈치를 내리고 걸을 수 있었다.
아빠가 안 계시는 주에는 그야말로 숨소리조차 내어선 안된다. 때론 새엄마와 마주치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도 많았다. 그럴 때는 욕조에 머리카락이 떠다녔기 때문에, 화장실에 소변을 보고 물을 안 내렸기 때문에, 방 정리를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수없이 맞아야 했다.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릴 수 없는 것은 안방과 화장실이 너무 가까웠고, 물을 내리는 순간 잠자고 있는 새엄마가 깨기라도 한다면 더 없는 체벌을 받을 것이 확실하므로 나름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아침을 준비하며 욕조에 때론 머리카락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사실대로 고할 수 없는 내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싶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지도 못한 채 집 밖을 나오면 학교에 가서 점심이 되어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교 시 배가 고프기도 했는데 항상 먹을 것을 사다 주는 친구 옆에 붙어 달달한 꾀돌이라도 먹으면 허기를 달랠 수 있었고, 아직 학원 수업 시간이 한참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학원을 가는 일이 많았다. 새엄마의 눈은 항상 나를 향해 흘기고 있었고, 물 마시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으므로 새엄마를 피하는 것이 내 입장에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단과학원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했는데 마치면 5시를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그 시각이 되면 바로 피아노 학원을 가곤 했는데, 피아노 학원에서 9시까지 있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선생님과 보조선생님이 계셨고, 같이 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때가 많았다. 선생님께서 컵라면을 사주셨고 그걸로 저녁을 먹는 날이면 너무나 행복했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컵라면 새우탕은 내 허기를 달래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면 무조건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했다. 새엄마는 한 시간 동안 방 밖을 나오지 못하게 했고, 공부는 무조건 한 시간씩 하게끔 했는데 때론 공부가 힘들어 책을 읽는 날이면 그마저도 혼이 나기 일쑤였다. 뒤로 등지는 문이 벌컥 열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머리라도 한 대 맞으면 정신이 없어진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진다.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어야 정상인데 그때는 정신이 사라지고 그저 온전히 맞아야 했다.
다행히 맞는 중간에 정신이 돌아오는데 책으로 여러 번 머리를 맞을 때나 굵은 30cm 자로 온 몸을 맞을 때 중간쯤 되어서야 아픈 감각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고 제대로 된 영문조차 모른 채 맞기도 했지만 그건 새엄마와 내 관계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쯤 안 맞게 될까?'
이런 상상조차 사치인 때였다. 처음에는 속으로 살려달라고도 외쳤으나, 나중에는 이 또한 사치임을 알았고 최선을 다해 아프지 않게끔 맞는 순간 힘을 주어 덜 아프게 맞는 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어른의 체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뾰족한 자의 모서리로 긁히거나 하면 몹시 아팠다.
'너무 아프다..'
'오늘은 조금만 맞았으면 좋겠다. 조금 살살 맞았으면 좋겠다.'
이게 바로 내가 있는 현실이었고 매일 적게 맞을 수 있길 기도하며 집에 들어갔고, 집에서 나왔다. 들어가는 순간에는 언제나 긴장을 하고 기도해야 했고, 나와서 문을 닫으면 그나마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