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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연 Mar 18. 2022

5화. 열한 살 친구들의 조언

얼른 할머니 집으로 도망가!





내가 한창 새엄마로부터 맞았던 때는 여름을 지나서였다. 그리고 여름을 지나다 보니 아직 얇은 옷을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반팔을 입었기 때문에 멍과 상처의 흔적들은 등에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열 번중에 5번을 등에 맞았고, 나머지 4대는 손바닥이었으며 1대 정도는 팔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수도 없이 맞은 매질에 상처가 생겼고, 친구들은 때론 나에게 묻고는 했다.


"니 오늘도 맞았나?"


"내 오늘도 맞고 왔다.."


그래도 반에서 활발했던 나는 친구들이 유일한 숨통이었기 때문에 그때 친한 친구 몇몇에게는 새엄마의 매질에 대해서 토로하곤 했다. 새엄마를 욕하기보다는 일단 아픈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수업시간에 뒤에 앉은 친한 친구들이 쪽지를 주곤 했다.





쪽지에 담겨 있던 내용들은 '도망가'였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던 몇 친구가 있었는데 할머니 집에서 살다가 아빠의 재혼에 의해 따라오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열한 살의 친구들은 내게 할머니에게 도망가라는 조언을 해주고는 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는데 때론 내가 생각하기도 싫은 땀냄새가 나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만이 알 수 있고, 땀을 가득 흘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 아마 한 대의 세탁기에 구분 지어 빨래를 하는 새엄마의 성격에 내 옷을 세탁하는 일이란 몹시 번거로운 듯해 보였다.


"누가 하루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노!"


친구들은 하루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고 속옷도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는다고 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우스갯으로 물어봤던 기억까지 난다. 하지만 나는 열한 살이었다. 학교에 만날 친구들도 많이 있었고, 땀냄새를 친구들에게 풍기고 싶지 않았다.


운동을 몹시나 좋아했던 나는 학교 후, 단과학원에 가기 전 놀이터에서 놀기도 했지만 운동장에서 때론 공을 던지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내내 가득 흘린 땀이 젖어버린 옷을 다음 날 또 입으려 해도 옷에 묻어있는 소금기 때문에 등이 뻑뻑해서 잘 내려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땀이 엄청 젖은 옷이 한번 건조된 이후에 마른 옷을 입어본 사람이라면 경험해 봤을 것이다. 소금기로 다분한 옷을 다시 입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찝찝함을 넘어 불결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른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새엄마는 내가 어떤 옷을 입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 있는 새엄마 눈을 피해 홀로 밖에 나오게 될 때도 신중했지만, 이미 기상한 새엄마가 주방에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전날에 입었던 옷을 입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가방 속에는 새 티셔츠를 하나 챙겨 넣어두었다.


집은 15층이었으며, 엘리베이터 1층까지 도달할 때까지 10초가 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엘리베이터 도착을 하여 가방은 들고 서 있었고 새 티셔츠는 꺼내놓고 있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면 이미 4층이 되기 전 옷을 갈아입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이고는 했다. 소금기로 절어있는 옷은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집에 도착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갈아입곤 했으며, 그날 입었던 새 옷은 다시 옷장에 집어넣곤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지 않았었나.


"니!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곧이어 이어지는 무서운 고함과 함께 30센티의 굵은 자가 다가왔다. 새엄마의 일그러진 인상과 얼굴은 동화책에서 봤었던 무서운 마녀와도 같았고 30대의 새엄마 얼굴에 있는 기미가 더욱 검고 짙게 보이던 때였다. 그렇게 나는 소금에 절은 옷을 입기 싫었지만, 다시 냄새나는 옷을 입어야 했고 친구들에게 사실을 고하며 속상함을 토로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여기 왜 있냐며 할머니 집으로 도망가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게 열한 살의 내 친구들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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