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무덤과 금관
고백하자면, 30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빈터와 황량한 초석,
동산같이 높고 큰 무덤뿐이라는 것이 내 감상의 전부였다.
특히, 대릉원은 내 기준에서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곳이다.
식당의 맛과 분위기를 평가하는 백종원처럼!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대릉원과 천마총, 쪽샘지구, 금관총...
수없이 많은 무덤은 나에게
간절함의 총합으로 보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소나무 숲속 대릉원을 지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신라인들은 이런 거대한 무덤을 지었던 것일까?"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불리는
형태의 무덤들은 마랍간기라고 불리는 4세기 후반 6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만들었다.
대단한 공력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돌을 쌓고 흙을 덮는 그 순간까지
인부들은 쉴 틈이 없었을 것이다.
오직 한 명을 위해
이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다.
이 무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대릉원과 일대의 무덤들이
만들어질 당시의 마립간시기는 김씨계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들은 황금을 숭상했고, 금관을 만들었으며
돌무지 덧널무덤이라고 하는 생소한 무덤 체계를
가져왔다.
당시 이들이 권력을 장악할 때는
무덤의 높이와 크기처럼 강성할 때가 아니었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 앞에 수도가 함락될 지경이었고,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으며
주변 국에 인질을 보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 신라의 마립간은 황금으로 만든 관을 만들고,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 때처럼,
많은 이들은 현실적으로 이런 모습들이
황당해 보였을 것이다.
무덤 만들 돈으로 무기와 군대를 더 양성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립간들은 달랐다.
간절하게 이 무덤 양식을 유지하며 만들었다.
금관총에 들어가 보니,
돌무지 덧널무덤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마립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무덤은
죽은 이의 무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간절함의 순간의 총합이다.
황금은 신라인들에게 있어
정체성이다.
왕의 성이 금이고, 수도의 성이 금성이다.
금관을 쓴 왕의 시체를 묻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 돌을 쌓는다.
얼굴만 한 큰 돌을 하나, 둘씩 들어 나른다.
그것들이 쌓여 무덤이 된다.
내가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그 돌을 나르는 인부의 마음이다.
군대 시절 노역이라고만 생각했을까?
난 다르게 보였다.
성황당에 돌을 쌓는 것과 같은 행위는 아니었을까?
금관을 보면 나무 같다.
마치, 성황당 나무이자 솟대처럼 보인다.
이 금관을 중심으로 쌓인 염원 어린 돌처럼,
신라인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나라가 되길, 상황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며 이 돌을 하나, 둘씩 나른 것이 아닐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라의 지배자, 마립간.
그들은 그것을 의도하고 돌무지 덧널무덤과 금관을 묻은 것이 아닐까?
큰 돌이 채워지면,
무덤은 흙으로 덮이고 산처럼 보인다.
하늘과 맞닿을 철럼 거대한 산을 보면서
신라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립간이여! 하늘에 가서
우리 신라를 보우하소서!
더 이상 주변 나라들의 괴롭힘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 당시 신라인들의 기도가 귓가에 맴도는듯하다.
신라의 무덤은
간절함이 모여 만든 결정체이다.
간절함이 모여야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작더라도 하나, 둘이 모여야 완성된다.
신라의 무덤처럼.
나의 간절함은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을까?
작지만 큰 시작과 도전을 하고 있을까?
염원이 담긴 돌 하나를 옮기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라의 무덤들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내 발걸음은 현재의 경주의 유산, 황리단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