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무계획 동유럽 여행기 01

1일 차 : 출발부터 프라하 2일 차 맛보기

by 잔물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서른살. 프리랜서로 살아온 지 8년 차.

일에 대한 회의감과 인생 노잼 시기를 겪고 나 자신을 위로할 겸 동유럽행을 택했다.

왜 동유럽행을 택했냐고? 부다페스트 직행 왕복 55만 원짜리 특가표가 풀렸기 때문이지.


특가표 소식을 듣자마자 대~충 10일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날짜 정해서 티켓팅을 하고

일에 치이느라 여행지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없이 대~충 어느 나라 갈 건지, 며칠 있을 건지, 나라 간 이동은 어떻게 할 건지 정도만 정한 상태로 여행을 시작했다.


워낙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어릴 때는 열심히 알아보기도 했었는데)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귀차니즘은 늘어가면서 그냥 대~충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건 자기 합리화뿐인가 보다.



#오전7시 #출발 #신남

친구가 본인 대신 함께 데려가 달라며 준 푸우 인형과 함께 '우리 푸우 추운 나라인데 옷을 얇게 입어서 어떡하냐-'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며 이른 새벽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나저나 포커스가 이상한데 맞았네. 자동카메라라 그런지 포커스가 영 내 마음 같진 않다. 인생이 뭐 언제 내 마음대로 됐냐만.


조금이나마 원활한 여행을 위해서 먼저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프라하로 이동하기로 했다. 사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처음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프라하 공항으로 트랜스퍼되게끔 끊었어야 했는데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다페스트로 갔다가 프라하로 가는 것보다 바로 프라하로 가는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껄껄)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티켓팅을 했기 때문에 입출국 심사를 한번 더 하는 일이 생겼다. 부다페스트 입국 -> 짐 찾기 -> 짐 다시 부치기 -> 부다페스트 출국 -> 프라하 입국.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이 딱 맞았다.


부다페스트 입국하면서 짐을 찾는데 보니까 수하물로 부친 캐리어가 깨져있었다. 긴 시간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망가진 적이 없었는데... 손잡이 부분, 바퀴 부분 어느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이 상태로 다시 수하물로 보내 버리면 더 망가질 거 같았다.


부다페스트 공항에 캐리어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아무리 봐도 없었다. (공항이 진짜 작았다. 체감은 거의 김포공항급)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비닐로 캐리어를 감싸는 랩핑 서비스 같은 게 있더라. 비닐 그거 한번 감싸는 거라 돈이 너무 아까웠지만 캐리어가 더 부셔져서 프라하 공항에서 짐을 찾을 때 완전 산산조각 나 있을까봐 어쩔 수 없이 랩핑 서비스를 받았다. 예상에도 없던 4,500포린트(한국돈으로 하면 1만 7천 원 정도?)나 썼다.


여행 시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후4시 #프라하행_비행기

여행 시작 전 미처 생각도 못한게 있었는데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이었다. 고로 해가 일찍 진다는 소리.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위에 있어서 일몰이 더 이르다. 동유럽의 일출 시간이 보통 오전 8시, 일몰 시간이 오후 4시 정도란다. 이걸 프라하행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알았다. 오후 4신 밖에 안됐는데 너무 어두워서. 정말 타이틀과 너무나 잘 맞는 무계획이자, 무정보 여행이다. 하하하.


평소에도 회사에 갇혀사느라 해를 잘 못 보는데 여행에서도 못 볼까 봐 좀 겁이 났다. 그리고 여행을 전지훈련급으로 많이 돌아다니는 나인데 해가 지면 어디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테니 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하나 고민이 되기도 했다.



#플래시온 #어둠 #프라하전경

촬영할 때 플래시 터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근데 가끔 잘못 조작해서 플래시가 터질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지금... 크흡. 이게 무엇인지 다들 모르겠지만 호텔 옥상에서 본 프라하 시내 전경이다. 화면을 밝게하면 나름 성도 보이고 노을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응... 네...


프라하 공항에서 숙소까지 찾아가는 길을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는 걸 공항에서 짐을 찾으면서 알았다. 그래서 급하게 가는 방법을 검색하고 공항 버스를 타고 프라하역에서 내려서 호텔까지 걸었다. 길치라 조금 헤매기도 하고 구글맵이 자꾸 골목길을 알려줘서 조금 겁이 나긴 했는데 무사히 호텔까지 와서 짐도 풀고 옥상에서 시내 뷰도 봤다.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IMG_6917.jpg #저녁먹으러_가는_길

프라하에서의 첫 식사를 뭐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구글링을 하는데 호텔 근처에 평점이 높은 식당을 찾았다. 프라하 전통 음식인 꼴레뇨(바베큐 양념을 한 족발에 매쉬드포테이토 곁들린 것)와 벨벳 맥주를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음식은 참 맛있었는데 서버가 인종차별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보니까 우리 테이블이랑 우리보다 어린 것처럼 보이는 한국인 여성분 세명 있는 테이블에서만 그러던데.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이런 취급 당하는 게 좀 웃겼다. 비꼬듯 말하는 태도부터 자기 마음대로 팁 가져가는 것까지. 후후. 너무 화가 나서 싸우려다가 친구가 말려서 참았다.


정말 안 좋은 일만 많은 첫날이었다.



#오전7시30분 #일출보러 #프라하2일차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


며칠간 편집한다고 밤을 새웠고 12시간이 넘는 긴 비행 속에서도 잠을 거의 못 자서 정말 꿀잠 잘 줄 알았는데... 새벽 4시쯤 눈이 떠졌다. 침대에 누워서 하릴없이 휴대폰만 하다가 이왕 여행 온 거 일출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출 시간 대충 검색하고 30분 전에 옥상에 올라왔다. 어제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뷰가 좋았다. 체크인할 때나 호텔 안내문 어디에도 옥상을 이용하라는 말이 없어서인지 그 누구도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사실 나도 새벽에 이것저것 검색 안 해봤으면 몰랐을 거야. 어쨌든 그 덕분에 전세낸 것처럼 옥상에서 일출을 즐겼다.



#해가뜬다

구름이 많이 껴서 해 뜨는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서울에서도 잘 못 보는 일출인데 프라하에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매일 같이 뜨는 해지만 다 같은 해가 아니기에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식을 대충 챙겨 먹고 테스코에 들려 캐리어를 사고 (내 돈...) 프라하 시내 구경을 하러 나왔다. 정말 1도 알아보지 않고 온 여행이기 때문에 그냥 발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났다.



#바츨라프광장 #크리스마스마켓

호텔 근처 광장. (사실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는데 글 쓰면서 검색해봤다. 신시가지, 바츨라프 광장이란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꼭 크리스마스 마켓을 경험해봐야 한다고 하길래 기대를 많이 했다. 생각한 것만큼 엄청난 것들이 있진 않았고 굴뚝빵 파는 곳, 핫 와인 파는 곳, 소시지 같은 먹을거리 파는 곳, 그리고 자그마한 인테리어 소품들 파는 곳이 전부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지만 그래도 하늘과 건물들이 다 했다.


크리스마스 마켓 하면 핫 와인이라고 하기에 한잔 먹어봤다. 얼죽아 회원으로 따뜻한 것은 잘 안 먹지만 와인을 따뜻하게 먹으니 어제의 안 좋은 감정들이 눈 녹듯이 같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달달한 와인이 기분을 한층 업 시켜줬다.



#화약탑

프라하에는 팁 투어를 하는 팀들이 많다. 건축물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명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 아직도 그게 어떤 건축물인지,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른다. 무계획으로 가는 여행의 문제점이다. 보고 감탄하고 즐기고 왔는데 어딘지 몰라. 껄껄. 팁 투어라도 같이 들었어야 했나.



#걷기 #어딘지모를골목길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여기는 관광지도 아닌 것 같은 느낌? 왜냐면 팁 투어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지.


정처 없이 걸으면서 느낀 것은 가는 길마다 옛 것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좋았다. 물론 돌길이나 오래된 건물들이 조금의 불편함은 줄 수 있겠지만. 요즘 들어 최신의 것을 따르기보다는 오래된 것을 아끼고 보존하는 일이 좀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조금은 느리게 사는 것이 숨 고르기라고 해야 할까, '나'를 돌아보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 없이 걷는 이 산책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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