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무계획 동유럽 여행기 02

2일 차 : 프라하 (2)

by 잔물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크리스마스 시즌에 동유럽 여행을 하게 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꼭 가보라'였다. 시차 적응 실패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검색을 해보다가 구시가지 광장이 프라하 크리스마스 마켓 중 가장 메인이라는 글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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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마켓 #구시가지광장 #틴성모교회 그리고 #천문시계탑

사람들이 정말 많은 곳이었다. 프라하 여행 온 사람들은 다 여기를 오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나오는 사진은 최대한 찍지 않는다'가 내 철칙이라서 비록 얼마나 많았는지는 사진을 보여줄 수 없지만 설명을 해보자면 핫 와인을 손에 들고 걷다가 사람에 치여서 남에게 쏟을까봐 걷기 힘들 정도라고 할까? 마치 박 모 씨 탄핵 시위 때 정도의 북적임이라고 해야할까? 암튼 사람이 진짜 많았다.


정각에 시계탑에선 시각을 알려주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다들 이거 보려고 한참을 서 있더라. 사람들이 한 곳만 바라보고 서 있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나 싶어서 같이 쳐다봤는데 시간을 알려주는게 전부였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 시간을 알려주는 것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겨우 이걸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는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시계탑에서 언제 시간을 알려주는지 휴대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며 이 퍼포먼스를 보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아이러니했다. 빠르고 정확해서 어쩌면 차가운 이 시대에 아날로그의 따뜻한 감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IMG_6952.jpg #무작정_걷기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을 하고 프라하 시내를 걷다가 늦은 점심으로 역대급 쌀국수를 만났다.


프라하는 베트남 이민자가 많아 쌀국수의 본고장이라고 칭할 정도로 매우 맛있는 집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대~충 구글맵에 검색을 해서 근처에 평점이 높은 쌀국수 집이 있길래 무작정 들어갔다. 결과는 성공적. 베트남에서 살다온 친구 말로는 베트남보다 더 맛있단다. 이 쌀국수 먹으러 또 프라하 가고 싶을 정도다. 근데 이름을 모르겠다 하핫


쌀국수로 배를 채우고 근처에 뭐가 있나 검색을 해보니 프라하성이 있단다. 그래서 거기를 가보기로 했다. 어중간한 시간에 밥을 먹고 나온 덕분에 적당히 일몰 시간 하고도 겹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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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교 그리고 #프라하성 #지나가던_아이가_탐낸_푸우

카렐교를 보기 위해서는 절대 카렐교 위를 건너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다리를 통해 프라하성으로 갔다.


블타바 강은 사실 우리네 강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주변 건물들이 이 강의 매력도를 더 높여주었다. 옛것을 간직해온 이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고 할까. 사실 어떻게 보면 조상을 잘 만난 덕일 수도 있다. 화려한 문화가 있었던 국가였고 후대는 그것을 잘 간직한 것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없애지 않고 지금까지 간직해온 이들의 안목에 부러움을 가득 담아 박수를 보내본다.



IMG_6985.jpg #길을_걷다가_만난_우체통
IMG_6987.jpg #어느_카페에서_바라본_프라하의_노을

프라하성을 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문득 <월간 윤종신>에 나왔던 정인 님의 <오르막길>이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그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느라 체력이 0이 되었는지 오르는 내내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는데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라는 가사가 떠오르더라. 이 오르막 길의 끝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오르막길>의 가사를 더더욱 곱씹으며 올랐다.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왼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길래 뭔가 싶어서 따라갔다. 어느 한 카페였는데 다들 인생 샷 찍더라고. 그래서 그 틈에서 프라하 전경과 노을 사진 한 장을 남겨보았다. 중간에 내려갈까 고민도 잠시 했었는데 이런 풍경을 보니 '아 이런 것을 보려고 높은 곳을 오르는 거였지' 싶더라.


조금 더 올라서 프라하성에 들어가려고 하니 엄청나게 긴 입장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다들 노을을 보러 가나보다. 카페에서 보는 거랑 크게 다를 거 같지 않다는 판단 하에 프라하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그 근처에서 프라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아도 멋진 순간이 있다.



IMG_6979.jpg #블타바강 #카렐교 그리고 #사색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근데 막상 내려오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카페를 가볼까 싶어서 왔던 길 말고 다른 길로 무작정 걸었다. 우연히 블타바 강과 카렐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겨있었다. 매일 같이 지는 해지만 그것이 전부 매일 똑같은 해는 아니기 때문에 오늘의 이 노을이 참 소중했다.



IMG_6991.jpg #백조의호수 그리고 #신화

블타바 강에는 엄청 많은 백조가 있었다. 새삼 내가 유럽에 있긴 있구나 싶었다.

백조의 호수를 보고 있으니 신화의 <T.O.P>가 생각이 났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너무 늙은이 티 낸다고 했지만 동년배라면 누구나 이 모습을 보고 <T.O.P>가 생각나지 않을까. 오랜만에 신화 노래 들으면서 어릴 적 추억을 곱씹어봤다. 초딩 때 듣던 노래를 서른이 되어서 그것도 프라하에서 듣고 있자니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성공한 어른 같기도 하고 새삼 잘 컸다 싶기도 하고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달까.



IMG_6958.jpg #프라하의_노을

걷다 보니 해가 진다. 이 모습이 참 눈물 나게 아름다워서 눈물이 조금 났다. (사실 눈물의 8할은 차가운 강바람 때문이었다.) 2019년 한 해 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상처 받음을 드러내기가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한 해였다. 이날의 노을은 그런 아픔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IMG_6973.jpg #프라하성의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사실 노을과 함께 프라하성을 찍고 싶었는데 구름이 많이 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질 수 없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비가 안 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 유명한 날씨 요정이라 여행지에 가면 늘 항상 비가 왔기 때문이지. 후후



IMG_6978.jpg #공원 #산책

블타바 강을 따라서 산책을 했다. 맥주 한 캔을 손에 들었으면 더 완벽했을 것 같았지만 춥기도 너무 추웠고 근처에 마트를 보지 못했기에 참았다. 한강에 유람선을 개조해서 만든 선상 레스토랑처럼 여기에도 그런 곳이 있었는데 갈까 고민도 해봤지만 대충 걷다가 얼른 호텔 가서 뜨뜻한 물에 샤워하고 싶었기에 패스했다. 강바람이 꽤 차가웠다.



IMG_6980.jpg #구시가지광장 #크리스마스마켓

호텔로 가는 여러 가지 길 중에 구시가지 광장을 지나쳐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낮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구경했으니 밤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다. 그리고 역시나 프라하 핫플을 만났고 사람에 치인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몸소 느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이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기에 열심히 셔터를 눌러봤다. 감도 200짜리 필름으로는 이게 최선이었지만.


프라하에서 가장 많이 먹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핫 와인이라고 할 것이다. 밤에 너무 춥길래 핫 와인을 사서 홀짝홀짝 마시면서 호텔로 갔다. 물론 다른 사람에 쏟을까 봐 종종걸음으로 갔지만. 추울 때 먹는 따뜻한 와인은 거의 쌍화탕 급이다.



IMG_6990.jpg #결국 #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와인을 사고 있는데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비가 쏟아부었다. 가방에 작은 우산 하나 챙겨 나오길 참 잘했다. 하루 종일 날씨가 좋길래 괜히 들고 나왔다고 그렇게 욕을 했었는데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한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줬다.


비가 오는 프라하의 밤은 더 멋있었다. 조명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은은한 조명 속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고 표현해야 할까. 매일 같이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크게 별 감흥이 없겠지만, 오래된 건물과 비와 조명이 합쳐져서 머릿속에서 영화 몇 편이 탄생했다. 느와르물이었다가, 멜로물이었다가. 어떠한 장르를 여기에서 찍어도 다 잘 어울릴 것이다. 첫날 겪었던 음식점의 인종차별도, 걸을 때마다 느껴지던 낯선 이를 바라보는 눈빛도 다 잊게 만드는 그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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