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무계획 동유럽 여행기 03

3일 차 : 체스키 크룸로프 그리고 할슈타트

by 잔물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IMG_7021.JPG #새벽 #잠들지_않는_프라하

무계획 여행의 유일한 계획. 오늘은 체스키 크룸로프와 할슈타트 투어가 있는 날이다.

왜 투어를 잡았냐면 일단 버스나 기차로 이용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리고 이날 크리스마스라 문을 안 여는 곳이 많을 것 같아서 그럴 바에는 새로운 풍경 구경이라도 하자 싶어서.


아침 6시 50분까지 미팅을 하기로 했기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미팅 장소로 향했다. 물론 시차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에 못 일어나는 거 없이 일찍 갈 수 있었다. 호텔에서 미팅 장소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는데 나무에 조명들이 계속 켜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나무의 건강 때문에 이제 나무에 전구 다는 것들을 이제 잘 안 하는데 여기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가, 왜지. 마치 우리는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지만 미국 애들은 그런 거 없이 한군데 그냥 때려 버리는 모습을 볼 때(미국가서 보고 진짜 엄청 놀랐다)의 감정이 들었다.



IMG_7039.jpg #차에서본일출

차를 타고 체스키 크룸로프로 이동하면서 3시간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을 노래를 들으며 보냈다. 잠을 잘까 했지만 워낙 차에서 잠을 잘 못 자서 깔끔하게 잠자는 걸 포기하고 바깥 풍경도 보고 찍어 놓은 영상도 정리하면서 방탄소년단 RM의 믹스테잎이었던 <MONO> 앨범을 계속 반복 재생했다. 새벽에 퇴근하면서 많이 듣고 위로받았었는데 낯선 풍경과 요즘 내 상태에 그의 우울하지만 위로되는 감성이 더해져 울컥하게 만들었다.


해가 떴다. 투어 인원이 6명이고 차도 카니발 정도로 큰 편이 아니라서 아무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일출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하게나마 한장 찍었다.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들>이라는 작품이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었다. 그가 그 작품에서 보여줬던 따뜻한 색감과 나무들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렸나?


비가 내리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가이드분이 계속 체스키나 할슈타트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다고 겁을 줬다. 제발 비가 와도 좋으니 많이만 내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를 했다.



IMG_7038.jpg #체스키크롬로프전경

체스키 크룸로프에 오니 다행히도 구름은 많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인데 잠도 못 잔 상태로 산을 오르려니 너무 힘이 들었다. 전경 보지 말까 싶다가도 체스키가 워낙 작은 마을이고 볼 게 없다는 말들이 생각이 나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올라갔다. 탁 트인 풍경이 내 속까지 뻥 뚫리게 만들었다.


파노라마 모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풍경이라면 파노라마로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카메라가 오래되어서 삐뚤빼뚤하지만 이 마저도 아날로그의 감성이 물씬 풍겨 나오기 때문에 사진 현상한 걸 받아보고 만족스러웠다. 물론 파노라마가 아닌 걸로도 오백 만장 찍었다.



3.jpg #이름모를성당

아치형 프레임 속에 담긴 이름 모를 성당.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러 자세를 취해보고 쭈그려 앉아서 겨우 담았는데 생각해보면 아트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히 찍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뭐 내 마음에 들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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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_그림자

받는 빛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을 준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역광으로 찍는 걸 좋아한다. 빛과 비례하는 그림자가 어우러져서 또 다른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산다. 그게 어떻게 어우러지냐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된다. 아름다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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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또걷기

감기에 걸려서인지 오래간만에 등산을 해서인지 기침을 계속하길래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실까 해서 카페를 찾았다. 근데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문 연 가게를 찾기가 힘들었다. 거리에 사람도 거의 없어서 좋긴 좋았으나 쉴만한 공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발사의 다리를 지나쳐 걷다 보니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작게 열려있었다. 아침부터 운동을 해서 배가 고프길래 찐 옥수수를 사 먹었는데 정말 아무런 맛이 안나는 옥수수는 처음이었다. 무-맛. 뉴 슈가를 좀 넣어서 쪘으면 존맛탱이었을 텐데. 문득 엄마가 쪄주는 옥수수가 생각이 났다. 엄마 보고싶다.



13.jpg #에곤실레아트센터_가는_길

체스키 크룸로프에 꼭 와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에곤 실레 아트센터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전시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기념품 샵에서 마그넷이랑 엽서만 사 왔다. 그의 우울함이 담긴 그림은 오스트리아에서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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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할슈타트

체스키에서 3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할슈타트. 가는 내내 비가 장마처럼 내려서 걱정을 많이 했다. 도착하면 비 제발 적게 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웬걸, 장대비가 쏟아졌다. 새벽에 나오기 전에 우산을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놓고 나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가이드분한테 우산을 빌렸다. 우산 하나에 둘이 나눠 쓰며 비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할슈타트 구경을 시작했다. 겨울왕국 배경지로도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중국에서는 할슈타트랑 똑같은 마을을 만들 정도라던데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인기 터지는 곳일줄 몰랐다.


할슈타트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알프스 산맥이다.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산 위에 눈이 덮여있었다.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덕이 부족한가 보다. 열심히 덕 쌓아서 다음에 날씨 좋은 봄에 다시 오고 싶다.



16.jpg #물안개

걸으면 걸을수록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카메라가 연식이 꽤 있어서 비에 젖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것 같았다. 소중히 품고 다니면서 조심히 한 장 한 장 찍었다. 그러던 중 봤던 크리스마스트리와 물안개의 조화는 참 잊지 못할 것이다.



17.jpg #눈물젖은빵을_먹으며

크리스마스날이라 문 연 가게가 없을 거라는 말을 출발할 때 미리 듣긴 들었지만 '오후에 가는데 설마 가게를 안 열겠어?' 싶어서 휴게소에서 겨우 크로와상 두 개를 샀다. 친구 것 하나 내 것 하나. 식당을 찾아 걷는데 문 연 가게가 진짜 거의 없고 설사 문을 열었다 하더라도 많은 인파에 대기 줄이 엄청 길었다. 머릿속에 '망했다'는 세 글자만 떠다녔다. 휴게소에서 사 온 빵을 먹으려고 해도 워낙 사람이 많아 사람을 피할 곳도,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장대비에 어깨 한쪽씩을 잃으며 걷고 있었다. 발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하길래 그냥 대충 먹자 하고 길에 서서 빵을 먹었다. 비에 젖은 것인지 눈물에 젖은 것인지 모를 빵을 먹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풍경이 꽤 아름다웠다. 내 생에 최고의 크로와상이었다. (물론 빵도 엄청 맛있었다)



18.jpg #비

비를 피해 성당에 들어갔는데 찬기가 확 오길래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지 싶어서 일찍 차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본 풍경. 마을이 참 예쁘다.



19.jpg #꽃피는_봄에_다시_만나자

차로 돌아가는 길, 이미 옷도 신발도 다 젖은 상태라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할슈타트를 제일 기대하고 왔는데 한두 시간 만에 돌아가기가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미 비가 많이 와서 구름이 산맥을 다 가렸지만 그것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맑은 날만이 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차 타고 오면서 내내 들었던 RM의 <everythingoes>라는 노래와 이 풍경이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내라는 뿌연 말 대신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외쳐주는 그의 목소리가 이 비와 바람과 차가운 공기에 잘 어울렸다.


햇빛이 쨍한 날만 가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비가 계속 내리는 날만 있을 수도 없다. 오늘의 할슈타트는 비록 비가 많이 내렸지만 내일은 또 맑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늘 비가 내리지 만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꼭 꽃피는 봄에 이곳에 다시 와서 이렇게 비 맞으며 했던 생각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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