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무계획 동유럽 여행기 04

4일 차 : 프라하에서 빈으로

by 잔물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1.jpg #프라하의_일출

시차 적응 실패자는 오늘도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프라하의 마지막 날이기에 오늘도 일출을 보러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해가 뜨기 전에는 구름이 가득해서 오늘도 맑은 하늘에서 해 뜨는 걸 못 보나 싶었는데 시간이 흐르니 구름이 많이 걷혔다. 조금 춥긴 했지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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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_프라하

떠나는 날 이렇게 하늘이 예뻐도 되는 건가. 오늘 같은 날 프라하 시내에서 사진을 찍으면 얼마나 예쁠까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오전 11시 기차로 빈으로 넘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사진만 몇 장 더 찍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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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역을_향해

배도 채웠겠다,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프라하 중앙 역을 향해 걸었다. 프라하에 온 첫날, 공항버스를 타고 프라하 중앙역에 내렸었는데 그때 본 풍경하고 확실히 달랐다. 첫날밤에 본 프라하 중앙역은 사람도 많지 않고 공원에 조명도 많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나쁜 사람들이 뛰어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오전에 보니 공원이 참 잘 되어 있었다. 벤치에 누워서 책을 보고 싶을 정도로.


낮과 밤이 다른 것이 이 도시의 매력인 것 같다.



5.jpg #기차타러

아무런 계획이 없이 여행을 떠나보니 멘붕에 빠지는 일도 허다했다. 출발 시간보다 30분 전에 프라하 역에 도착했는데 역이 생각보다 크고 영어 안내가 잘 안되어 있어서 빈에 가는 기차를 어디서 타는지를 못 찾겠더라. 급하게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는데 인터넷은 잘 안 터지고 출발 시각은 가까워오고 정신이 없었다. 출발하는 곳을 찾고 나니 이번에는 티켓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 예매한 내역 그대로 프린트했는데 QR코드나 바코드 같은 것이 없어서 이대로 기차를 타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창구에서 실물 티켓으로 교환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급하게 역무원한테 물어서 그대로 타도 된다는 말을 듣고 기차에 올랐다.


출발하기 5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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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_안녕 #빈으로_가자

여행을 함께한 친구와 나는 쿨한 사이라 우리는 매번 여행 때마다 각자의 시간을 존중했다. 그래서 기차도 쿨하게 1인석으로 따로 떨어져 예매했다. 막상 자리를 찾아서 앉으니 역방향이었다. 더군다나 내 자리는 창문도 없었다. 이동할 때 사진이나 영상을 좀 남기려고 했는데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니 밀린 다이어리를 쓰고 책을 읽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라는 노래를 무한 반복했다. 이번 여행과 참 잘 맞는 노래다.

사실 이 무계획 동유럽 여행을 처음 계획했을 때 친구도 나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가득했었다. 노래가 주는 힘이 참 대단한 게 그동안 한 번도 친구에게 꺼내지 못한 말을 이 노래로 대신했다.


힘들었던 한국을 도망쳐서 프라하에 온 지 4일 차, 씩씩하게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게 상처를 열심히 치유해야겠다.





9.jpg #여기는_빈

빈에 도착하니 확실히 우리보다 GDP가 높은 나라라 그런지 도시가 잘 정돈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프라하보다 훨씬 춥더라.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지만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면서 호텔을 찾았다. 그 와중에 길 잘못 들어서서 역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10.jpg #아이언맨의_등장

무계획인 여행이지만 원래 예상은 4일 차 빈, 5일 차 잘츠부르크, 6일 차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 이렇게 대충 짜뒀었는데 해가 생각보다 일찍 져서 빈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기차표를 취소하고 미리 구입했던 잘츠부르크 카드를 취소하려고 보니 환불이 안되더라. 멍청 비용으로 약 6만 원 정도를 썼다.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법이지. 하하하...


호텔에 짐을 풀고 어디를 가볼까 찾다가 프라터 공원에 가기로 했다. <비포선라이즈>에서 첫 눈에 반한 그 커플이 첫 키스를 했던 바로 그 곳. 노을이 정말 예쁘다고 하길래 노을 보러 가려했는데 밥을 먹고 나오니 도착할 때 되면 이미 해가 져 있을 것 같았다. 갈까 말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뭐 호텔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프라터 공원에 가는 트램을 기다리며 하늘을 보니 비행기가 비행운을 남기며 날아가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비행운이 또렷하게 잘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12.jpg #고독의_뒷모습

트램을 타는 것이 되게 막막했다. 검색을 해보니 트램에서 펀칭을 해야 한다는데 다들 말로만 설명해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뭐 헤매고 있으면 누군가는 도와주겠지 싶어서 일단 탔다.


트램에 타니 어느 중년의 여성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그리고 옆에 앉은 딸같이 보이는 사람에게 계속 이야기를 했다. 누가 봐도 우리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한국말로 열심히 그들 이야기를 했다. 프라하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는 기분 나쁜 것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표현했는데 이제는 그냥 한국말로 씹게 되더라. 이렇게 익숙해지나보다.


프라터 공원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가는 길 내내 앞에 앉은 남자가 창문을 보면서 고독에 잠겨있길래 카메라에 담았다. 뒷모습에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13.jpg #해가졌다

프라터 공원 근처 정류장에서 내리니 벌써 해가 졌다. 구름도 많이 껴서 그런지 프라하보다 해가 더 일찍 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 빈은 프라하랑 다르게 가로등이 너무 적었다. 잘 사는 나라라 치안에 자신이 있는 걸까. 아니면 돈을 이렇게 아끼는 걸까. 프라터 공원을 향해 가는데 너무 어두워져서 조금 겁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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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프라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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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터1990

프라터 공원에 오니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다. 에버랜드 초창기 느낌이랄까. 미국 영화에서 보던 놀이공원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릴 때 생각도 많이 났다. 에버랜드로 소풍 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를 곱씹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옛날 얘기를 해서 그런지 중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마음은 언제나 그때와 다를 게 없는데 '참 많이 컸다'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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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밤이 되니까 하나둘 씩 문 닫는 놀이기구가 많아졌다. 그래서 프라터 공원을 뒤로하고 다른 곳에 가보기로 했다. 밤에 가볼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검색해보니 빈 시청사 쪽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크게 열린다고 하더라. 그래서 프라터 공원을 뒤로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향해 가기로 했다.


나중에 날씨가 좋을 때 다시 올게. 안녕 프라터.



25.JPG #빈 #크리스마스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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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오스트리아 사람들 다 여기 모여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다. 추워서 핫와인 먹으려고 했는데 핫와인 들고 가다가 100퍼센트 사람들한테 쏟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구경을 먼저 하기로 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보다 훨씬 큰 규모여서 돌아보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근데 살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가가 너무 비싸서 그 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는 여행하러 오면 앞뒤 생각 안 하고 돈을 그냥 막 썼는데 이제 나름 고민을 하게 된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제 좀 머리가 커진 그런 어른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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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놀이공원

크리스마스 마켓 옆쪽으로 작은 놀이동산 같은 것이 있었다. 관람차와 회전목마가 있는 곳. 핫 와인을 사서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사람들 구경하면서 와인을 마셨다. 참 맛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앉아있으니 놀이동산 관리자 같은 분이랑 인사도 하게 되었다. 트램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오스트리아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친절한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역시 인종 차별하는 건 개개인의 성품에 따르는 것 같다. 싸잡아서 욕하지 말아야지.



28.jpg #다시 #집으로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와인을 마시니까 피로감이 몰려와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트램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문득 눈에 보이는 빈 야경이 너무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감성이 막 올라왔다. 대학생 때 뮤지컬 모차르트의 <여기는 빈>이라는 넘버를 열심히 들었는데 직접 빈에 와서 있다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뭔가 성공한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울컥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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