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인 오피스텔에 체크인하고 잠시 근처 마트에 장 보러 다녀온 니콜은, 우산을 썼음에도 쫄딱 젖어있었다. 서울에서의 일정은 대부분 실내 위주라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창을 때리는 비의 양은 점점 공포스럽게 변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늑한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데, 걱정스러운 뉴스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침수로 갇혀 신고했지만…서울 반지하 일가족 3명 참변
<조선일보 22.8.9>
"여기 사람 있어요"…한밤 폭우에 반지하 발달장애 가족 참변(종합)
<연합뉴스 22.8.9>
계곡물에 휩쓸리거나 산사태가 난 것도 아니고, 집이 잠겨 사람이 죽다니. 재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언니와 10대 딸 그리고 A씨. 순식간에 불어난 물에 문은 열리지 않았고, 두 명의 이웃이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A씨 가족의 기사에 묻혀 잘 몰랐는데, 동작구에서도 한 여성이 반지하 빌라에 갇혀 사망했다고 한다. 이날 반지하에서 죽은 사람은 총 4명이다.
나 역시 반지하 출신이기에 이 기사가 남일 같지 않았다.
첫 반지하는 봉천동에서 시작된다. 비탈길을 따라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아파트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5층짜리 건물이 나온다. 뒤로는 더 이상 집이 없고, 그냥 산. 산 꼭대기에 지어진 아파트였다.
경사면을 깎아서 만든 곳이다 보니 들어갈 때는 분명 지상인데, 창밖을 보면 반 이상 땅속에 잠겨 있다. 화장실은 너무 좁아서 뒤처리를 할 때마다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장판을 들춰보면 습기가 고여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기관지염에 피부병까지, 늘 골골거리며 살던 시절이다.
매일 밤 퇴근 후 지하철 역을 나와 등산을 하듯 길을 오르고, 방 문을 열면 다시 반지하로 들어가는 삶. 이럴 바엔 집 없이 회사 간이침대에서 자던 때가 좋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분명 아파트 건물인데 구조는 윗 집들과 전혀 다른 곳. 알고 보니 집주인이 반지하 창고를 개조해서 세를 놓은 것이었다. 반지하는 70년대 방공호 또는 대피소를 대신할 곳을 양성화하기 위해정부가 건축법을 개정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거주 목적이 아닌 곳.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주택난이 가중되면서 반지하의 삶이 시작되었다.
신림동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조금 더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역시나 한쪽 벽은 지하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봉천동 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집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된 것이어서, 여름철 곰팡이 외에 큰 불편은 없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추억도 많이 쌓았다. 시장에서 장을 봐다 된장찌개도 끓여먹고, 주말이면 순대골목에서 니콜과 술도 한 잔 하고, 한 해 한 해 연봉이 올라가면서 앞으로는 좀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잠들던 시기였다.
서울시는 사고를 막기 위해 주거목적의 반지하를 전면 불허하고, 이미 허가한 반지하도 20년 안에 없애기로 했단다. 법을 개정해서 의무적으로 짖게 할 때는 언제고, "이젠 책임지기 싫으니 다 방 빼고 나가세요." 하는 모양새다.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행정. 서울시 전체 가구의 5%, 20만 가구의 반지하인들은 20년 안에 집을 비워야 한다.
숙소에 누워 창밖을 보니, 빗방울에 굴절된 아래 세상은 아름답게만 보인다. 주위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코 앞에 롯데월드와 석촌호수가 있다. 뉴스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그분들의 고통을 통감하기에 이곳의 집들은 너무 높다.
10살 딸은 아빠 속도 모르고 숙소가 맘에 든다며 싱글벙글이다. 경치도 좋고 인테리어도 깔끔한 것이 딱 자기 스타일이란다. 여행의 기분을 망치긴 싫었지만, 테헤란로 8층 사무실에서 봉천동의 반지하로 기어들어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울적해져 버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