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쩨이 Jul 16. 2020

일본 대학원, 편애의 달콤함

지도 교수가 별로라는 글을 보면 그 뒤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1. 정말로 교수의 인성이 별로인 경우

2. 교수의 인성을 별로로 만든 경우


1의 경우도 많이 듣고 봐 온 게 사실이지만 석사 졸업하고 교수님과 독대하면서 2의 경우 또한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었다.  

혹시 부정적인 글만으로 대학 교수는 어떻다 하는 고정된 이미지가 생기거나 대학원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을까 봐 이런 케이스도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이번 글을 써보려고 한다.


석사 때는 일주일에 하루, 담당 교수님이랑 직접 데이터를 가지고 앞으로 뭐할지에 관해 대화하는 디스커션 데이가 있었다. 

석사를 졸업 하기 약 2개월 전, 여느 날과 같던 디스커션 데이에 교수님이 나를 향해 '한 달 동안 일본 연구실에 가볼래?' 하고 물어보셨다. 당돌하게도 어리고 또 실험에 넌더리가 났던 나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 저는 취직 준비를 해야 하니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학교가 나름 좋은 학교였고, 심지어 경비를 일본 학교에서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갑자기 사라진 나는 교수님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말 바꿔서 죄송합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일본, 제가 갈게요!' 하고 말을 정정했다.


이때부터였을까, 우리 교수님의 편애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시작된 것은..


해외에서 돈을 받으며 인턴도 아닌 방문객 개념으로 연구실에 있다는 것=놀자 놀자 신나게 놀자!

하고 생각했는데, 이 놈의 한국인 근성이 어디 안 가서 평일엔 10시부터 8~9시까지 제법 열심히 실험실에 있다가 주말에나 여기저기 휘리릭 놀러 다니곤 했다.

그렇게 신나게 해외를 맛보던 이 무렵 나의 스킬 트리가 역시 당돌함에 스탯 몰빵이었는지, 박사과정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하고 지금의 내 지도 교수님한테 어필까지 해버린 것.


교수님의 오케이를 받고 뒤에 펼쳐질 이야기도 장밋빛이었으면 그 나름 또 좋았겠지만 인생이라는 게 또 그렇지만은 않아서 그 뒤로 나는 문부 과학성 장학금 시험에 두 번 응시하고 두 번 떨어졌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장학금 없어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그놈의 당돌함으로 입학시험부터 봤는데 결과는 합격이었고 그렇게 장학금 없이 현금을 들고서 일본에 오게 되었다.


일본에서 와서 몇 개월을 보내고 교수님이 나를 불러서 '내가 학생한테 돈 준 적 없는데 쩨이는 열심히 하니까 장학금 될 때까지 내가 돈 줄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하시더니 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로 RA를 챙겨주셨다.

그리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던 대로 장학금을 받게 될 때까지, 또 받게 된 그 마지막 순간마저도 돈을 항상 챙겨주셨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수님이 '쩨이가 입학시험 때 수석이었어.'라고 말을 꺼내셨다.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나는 교수님이 오케이 해서 붙은 건 줄 알았는데요?라고 말했고 교수님은 웃으며 아니야, 네 실력이었어.라고 말해주셨다. 내가 입학시험을 쳤던 년도에 석사 하다가 박사로 올라가기로 한 학생이 많아 TO가 딱 한 자리였고 그 한자리를 운 좋게 입학한 게 나였다고. 


아프다고 조퇴한 날에 당시 옆방에 살던 동기 아기 손에 과자랑 수프 같은 걸 보내주셨던 상냥한 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던 나에게 논문 빨리 쓰는 거로 갚아줘.라고 하셨는데,

나는 달콤함만을 빨아내고 어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중인 거 같다.


나는 당돌했던 말 몇 마디에 운 좋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당돌하게 도전해보면 좋겠다.

정말 삶이라는 게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고.


작가의 이전글 Dear THERE, 2007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