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이가 수학 과학 괴물이 될 아이랍니다.[1]
학군지 이 동네에서 고등부 수학으로 유명하다는 학원 3군데의 레벨테스트를 예약했다.
허망하게 흘려보낸 중학교 마지막 시험이 끝난 11월이었다. 수학 공백을 막기 위해 기존 학원은 계속 다니면서 시험일정을 잡았더니 일주일이 수학 일정으로 꽉 찼다. 화목토엔 기존 학원이, 월수금엔 각각 3군데 레벨테스트가 있었다.
월요일은 E학원 시험이었고, 시험범위는 고1 수학 전범위였다. 레벨테스트를 치른 후 전화가 온다. OOO선생님 알아보고 응시한 거냐며, 티라노가 OOO선생님반 합격 기준에 통과돼서 입학이 가능하며, 이 학원 최상위반이라는 것이었다.
티라노가 3학년 들어서부터는 수학을 잘하는 줄은 알았었다. 수학적 감각이 있는 데다가 ADHD약물치료를 시작한 이후에는 실수가 많이 준 이후로 수학실력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앞편에서도 언급했듯, 성실하기는커녕 집에서는 빈둥빈둥 놀며 게임이나 휴대폰만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사실은 '이 학원에 수학을 잘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어서 티라노가 1등을 몇 번 하는가 보다...' 라며 가볍게 생각했다.
'아 여기 유명하더니 수학 잘하는 애들이 생각보다 없나 보네? 지금 학원이랑 학생들 수준이 비슷한가 보다!'
자존감이 낮은 나와 티라노는 둘 다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E학원 최상위반 합격은 말도 안 된다, 레벨을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내 귀와 결과를 믿지 못해 합격한 반 레벨이 최상위반 맞냐는 확인 전화를 했다. 최상위반 합격은 기쁘지만 E학원 교육과정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문제였다. 차갑고 쌀쌀맞던 데스크 직원 태도가 최상위반 합격으로 돌변하며 친절해진 점도 별로였다. 익숙해질 법도 하거늘... 한두 번 당한 푸대접도 아닌데 마음은 다시 쓰라려온다.
이틀 후 두 번째 F학원 레벨테스트를 보았다.
E학원보다 입학시험 범위가 넓었다. 고 1 공통수학과 고 2 대수 및 미적분이 시험 범위였고, 하필 기본서로 한 번만 본 데다 배운 지도 오래된 대수도 포함이었다. 결국 대수 점수가 발목을 잡아서 최상위반은커녕 생각보다 낮은 반에 배정되었다.
학원에선 공통수학과 미적분은 잘 보았지만, 대수는 기본 개념을 묻는 문제조차 틀려서 어쩔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다. 배운 지 오래된 데다가 레벨테스트를 준비할리 만무한 티라노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 E학원이 유명세에 비해서 공부 잘하는 애들이 별로 없는 게 맞았나 보네!'
이번에도 역시 티라노의 레벨테스트 결과를 신뢰하지 않고 내 멋대로 아이의 능력을 평가절하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엄마인 나였다. F학원은 시험 보러 갔을 때부터 결과통보까지 정말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지만 E학원의 최상위반을 놔두고 낮은 레벨의 F학원에 입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학원은 마지막에 응시할 G학원이었다.
G학원은 교육과정부터 눈에 들어왔다. 중간레벨 이상의 반들은 공통수학이 아닌, 대수와 확률통계부터 짚고 넘어간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중3 겨울방학에는 최상위반이어도 무조건 공통수학부터 한다는 E, F 학원들과도 차별화가 있었다. 공통수학(1)은 개념서부터 심화서까지 2년 동안 7번이나 훑었지만 대수와 확률통계는 한 번밖에 못 보았기에 티라노는 지금 공통수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커리큘럼도 마음에 들지만 학원 분위기도 무언가 차갑지 않고, 친절한 점도 좋았다. 공부를 못하게 생겼는지, 다소 부산스러운 태도 때문인지 늘 첫인상만 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이다가 시험성적이 의외로 높을 때마다 태도가 돌변하곤 하는 대접에 익숙했던 우리였다. 그런데 여기선 처음부터 이유 없는 친절과 귀한 사람이 된 듯한 대접을 받았다. 레벨테스트를 보러 온 단 한 명의 학생 면담을 하러 그 큰 학원의 원장님이 직접 마중까지 나와 인사하셨다. 시험이 끝났을 땐 부원장님이 아이를 배웅해 주었고 말이다. 낯선 따뜻한 이 학원 태도가 ADHD적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심지어 E, F학원들과는 다르게 테스트 전 사전 면담까지 있었다. 모든 과목들을 어느 문제집으로 어디까지 공부했는지를 자세히 물어보시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 근데 왜 과학고 준비 안 하셨어요!"
거기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3학년 2학기에 E(60점 미만)만 6개인데 어떻게 과학고를 준비하나요!'
G학원, 꼭 붙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하필이면 티라노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대수도 시험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국 대수 때문에 교육과정과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E학원을 갈 수밖에 없는 결말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가장 희망하는 G학원의 레벨테스트가 다가왔고, 티라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지 오래돼서 기억이 거의 안 나니까 대수 복습을 조금만 하고 가면 어때?"
언젠가는 공부를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아직도 놓지 못했나 보다. 반쯤은 포기한 채 운을 떼며 제안을 해보았다. 오잉? 그런데 웬일로 화를 내지 않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란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이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인 건가 싶다.
말로는 그러겠다고 해놓고 역시나 또 미루면서 폰만 들여다보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대수 복습 언제 할 거냐고 재촉했다가 사춘기 남자아이의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두려워 잔소리도 못한 채 티라노 눈치만 보고 있다. 괜히 잔소리했다가 그나마 보러 간다던 레벨테스트도 안 보겠다고 돌변할까 봐 그게 걱정인 것이었다. 순간의 감정에 휩싸이면 금세 태도로 돌변하곤 했기에 충분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은 컸다. 그렇게 한다던 복습은 미룬 채 레벨테스트는 결국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대수 복습을 미루고 미루다가 시험을 고작 한 시간 남긴 시간이 되어서야 대수 복습을 시작한다. 미루기 전문가, ADHD 티라노씨다.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책 한 권 분량의 공식을 복습하자니 똥줄이 타는지 미친 듯 문제를 푼다. 불이 붙어 엄청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책맞게 자꾸만 눈물이 난다. 시험공부 거부 선언 이후로 티라노가 공부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으니까!
이제 레벨테스트를 보러 갈 시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생소한 아름다운 모습을 끊는 것이 너무 아깝다. 눈치를 보다 살짝 제안을 건네어 본다.
"혹시 공부 조금만 더 하고 싶으면 레벨테스트 한 시간만 미뤄도 되나 물어볼까?"
오잉? 내 예상과 다른,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어차피 미룰 거면 더 미루지, 왜 1시간만 미뤄?"라고 말이다.
이때다 싶고, 태어나 처음 해보는 자기주도 학습의 만족감을 느껴 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늘이 내 노력을 알아주어 기회를 준 건가 싶다. 그렇게 전화로 레벨테스트를 2시간 뒤로 미루었다. 티라노는 중간중간에 잠깐씩 쉬어가며 총 3시간가량 대수 벼락치기를 한 후 레벨테스트를 응시했다.
G학원 부원장님이 직접 결과 안내전화를 해서는 말도 안 되는 말만 늘어놓는다.
각 20점 만점에 미적분은 17점, 대수는 12점을 맞아서 최상위반에 합격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티라노는 수학 과학의 괴물이 될 아이예요! 대수는 기본서로 오래전에 한 번만 본 데다, 그 쉬운 문제집으로 3시간 벼락치기했다는데 12점을 맞아서 놀랐어요." 란다. 잊지 말아야지... 수학 과학의 괴물이 될 아이... 잊지 않으려고 받아 적는다.
이렇게까지 티라노를 좋게 봐준 사람은 처음이라 놀랍다. 어딜 봐서 그렇게 생각하나 신기하기까지 하다. 저 말이 너무 좋아 며칠 동안 자꾸만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자기야, 우리 티라노가 수학 과학의 괴물이 될 아이래. 레벨테스트 결과 하나만 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풀이과정이 거의 없는데 맞춘 거 보면 아는 건가? 시험도 혼자 치러서 커닝할 사람도 없으니 말이야."
남편에게도 귀에 피나도록 자꾸만 말한다.
3년을 꼬박 다닌 지금의 학원과 비슷한 느낌, 바로 여기다! ADHD까지 있는 이 아이의 부산스럽고 어딘가 다른 겉모습만 보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내면의 잠재력을 알아보아 준 학원. 티라노 인생 16년 통틀어 딱 세 군데뿐이었다. 4년을 다닌 어린이집, 3년을 다닌 수학학원, 그리고 여기. 이 정도면 예민한 아이여도 적응할 수 있다. 적응하도록 분명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