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에 빠진 학군지 중학생, 수학공부 이야기
오늘은 티라노씨 공부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중학교 수학학원 이야기로 돌아가보려 한다.
학원에 떨어져 과외만 하다 학원에 합격해 겨우 다니게 된 게 6학년때였다. 그리고 영어학원은 다닌 지 6개월 만에 위기가 와 결국 1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그만둔 채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07화 영,수를 강조하던 교사의 자녀학원선택, 과연 옳았을까? 참고) 사실 영어학원만 위기가 왔던 건 아니었다. 수학학원도 위기가 몇 차례 있었다.
낮은 반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레벨업이 연달아 일어났다.
상담선생님께서 연산문제도 아닌 시험지에 답만 쓰인 걸 이상하게 여겨 티라노에게 풀이과정이 왜 없냐고 물어본 게 계기였다. 이에 "암산한 건데요"라며 풀이과정을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상담선생님께선 전화를 하셔 선 레벨업이 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티라노 머리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풀이를 쓰지도 않고 전부 암산으로 풀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로부터 몇 달 후, 티라노는 ADHD인가 싶어 찾아간 소아정신과에서 한 풀배터리 검사에서 IQ가 고작 89가 나왔다.) 그렇게 시작부터 높은 선생님께 좋게 찍혔고, 수학학원만 가면 총명하고 촉망받는 인재가 되었다. 산만하고 엉뚱해서 수업 방해를 하는 학교에서와 달리 말이다.
이 동네 수학학원은 2개월 동안 두 학기 수학 2권을 끝낸다. 학기가 다른 기본서와 응용서 2권을 6번, 12개월이면 한 학기를 2권씩 풀며 중학교 수학 전체를 한번 훑는 시스템이다. 레벨이 높을수록 당연히 진도가 빠르다. 레벨업 후 2달간 겨우겨우 응용서로 2학년 1학기 수학을 끝내 이제 2학년 2학기를 드디어 기초서부터 할 차례가 되면 레벨업. 레벨업을 해서 또 2학년 2학기를 응용서로 시작해서 따라잡으면 레벨업이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2, 3학년 수학의 대부분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응용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선행학습인데 어려운 책으로 처음 배우니 쉬울 리가 없었다. 그 6개월간은 참 힘들어했다. 그럴 때마다 "많이 힘들지? 다른 아이들은 기초서를 이미 끝내고 하는 책인데 넌 2-1, 2-2, 3-1 전부 이 책부터 시작했으니 얼마나 힘들겠어. 너니까 이 정도 버티고 해낼 수 있는 거야. 네가 힘든 게 당연한 거야."라고 응원과 지지하는 말을 자주 해주었다.
게다가 레벨이 올라가 만난 완벽주의 선생님으로 인해 수학학원의 진정한 위기가 왔다.
숙제량도 너무 많은 데다 틀렸던 문제의 오답노트 작성까지 완벽히 해오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으며 철저히 관리하셨다. 부모입장에선 좋으나 티라노는 당시 참 힘들어했다. 영어학원 때처럼 툭하면 그만둔다며 울고불고하곤 했다. 그때마다 "티라노야. 너 영어도 안 하는데 수학만큼은 절대 놓으면 안 돼.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야 무시받지 않는 거야. 근데 너의 한방이 수학이잖아. 엄마도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해 볼게. 조금만 더 참아보자 응?"이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곤 했다. 그러길 몇 달, 선생님이 바뀌며 위기가 지나갔다. ADHD와 심리 공부를 많이 한 지금 돌이켜보면 티라노씨가 완벽주의 선생님을 힘들어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 ADHD라 선천적으로 꼼꼼한 일을 수행해 내는 것이 도움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아이에게 완벽한 과제 제출을 요구하면 '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데 어쩌지? 너무 힘들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ADHD의 마지막 D가 disorder(장애) 임을 잊지 말자.)
2)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절대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고쳐 풀은 문제들과 딱 한번 틀린 문제까지 전부 고대로 노트에 베껴놓아야 하는지 본인 딴에는 논리적인 납득이 어렵다. 영어 단어를 왜 꼭 쓰면서 외워야 하냐며 영어 단어 반복해서 써가기를 거부하던 때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
3) 사전에 통보되지 않은, 홀로 남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는 타고나길 예민한 성향을 지녀 환경변화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차례 수학학원의 위기를 무사히 흘려보내며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중3 첫 중간고사 후 수행평가는커녕 학교시험까지 전부 놓아버렸다. (11화 중3 1학기 기말, 갑자기 공부거부를 선언했다.)
중3이던 작년 5월. 그렇게 공부에 대한 모든 잔소리를 멈추었다.
모든 학교 생활의 무기력이 온 아이를 잔소리로 더 궁지로 몰아넣을 순 없었다. 그렇게 학교공부뿐 아니라 수학숙제 잔소리까지 전부 멈추었더니 정말로 집에서는 단 1분도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수학학원에서는 숙제를 안 해온다는 말이 없다. 수학숙제를 해가긴 하는 건지... 수학마저 놓으면 어쩌나 불안해 미치겠다. 참다 참다 눈치 보며 묻는다. "근데 티라노야, 수학숙제 해가긴 하는 거니?" 티라노가 대답한다. "응. 학교 쉬는 시간에 해~" 하루 쉬는 시간을 다 합쳐봤자 하루에 3~40분이 전부다. 친구들과 놀지 않고 쉬는 시간에 숙제만 한다 해도 말이다. 학교 점심시간엔 휴대폰 사용이 가능해 내내 게임만 하기 때문이다. '고작 그 정도 시간 가지고 학원 숙제가 감당이 다 된다고?' 이상하다 싶다. 그렇지만 따져 묻지도 못한 채 "응. 다행이다."라고 대화를 급히 끝낸다. 그나마 유일하게 하는 수학공부마저 때려치울까 싶은 마음이 들어 채근도 무섭다.
그러던 어느 날, 티라노씨가 100% 서술형이었던 수학학원 월말평가에서 압도적 1등을 했다며 연락이 왔다.
집에서 숙제조차 전혀 안 하고 게임만 하는 내 아이가 학원에서 1등 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티라노가요?? 시험이 쉬웠나요?"라고 묻는 내 말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심지어 글씨도 평소와 달리 또박또박했어요! 그래서 티라노 시험지 맞나 이름을 세 번이나 확인한걸요!" 선생님과 나는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이번 서술형 시험 쉽게 낸 게 아니었어요. 어렵게 냈어요. 티라노 97점이에요. 그것도 딱 한 문제에서 부분 점수를 맞아서 감점된 거고 나머진 다 맞았어요. 채점도 봐주면서 한 게 아니고 깐깐하게 채점했어요. 근데 티라노가 잘 풀었고, 풀이과정도 정말 잘 썼어요. 2등이랑 점수차가 많이 나요. 그냥 1등 아니고, 압도적 1등을 했어요. "
시험이 쉬운 것도, 봐주며 채점한 것도 아니라면 혹시 학생수가 적어서 잘 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학생수를 묻는다. 선생님은 중3은 50명 정도 된다고 하신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선생님이 학생수가 이보다 적은데 민망해서 부풀려 말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된다고 여겼다.
그 이후로도 수학학원에서는 늘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숙제하라는 잔소리를 아얘 멈추니 도리어 수학성적이 오른 게 너무 이상하고 이해가 되질 않는다. "너 집에서 숙제 한 번도 안 한 지 오래됐잖아. 근데 학원에서 왜 성적이 도리어 오른 거야? 엄마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 이게 말이 돼?"라고 재차 묻는다. 당연하다는 듯 티라노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잘하는 애들이 많이 그만뒀어. 그래서 내가 자꾸 1등 하는 거야. 내가 잘하는 게 아니야." '아, 그래서 학생수도 50명이라고 부풀려 말하신 거구나.'라며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린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수학학원을 옮기기 위해 레벨테스트를 보러 다니기 전까지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는 공부라고는 오로지 수학숙제밖에 안하는, 예민한 ADHD 아이의 오래 다닌 수학학원 옮기기 비상사태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저와 티라노씨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공감과 위로가 되는 글을 쓰려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