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넘게 다닌 학원에 올 게 와버렸다.
"엄마, 우리 반에 다 그만둬서 지금 나 빼고 한 명 남았어!
근데 하필 남은 애가 우리 반에서 제일 못하던 친구야. 근데 선생님이 그 애 수준에 맞춰서 문제를 주시는데 나한텐 너무 쉬워. 그걸 풀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
수학학원에 다녀온 어느 날 잠들기 전 말한다. 오죽 답답했으면 내게 털어놓았을까. 속내를 잘 말을 안 하는 아이라 웬일로 마음을 보여주니 반가우면서도 놀랍다.
초6 때 다른 학원 레벨테스트에 계속 떨어진 아이를 받아준 학원이었다. 낮은 반 아이를 수학적 감각이 뛰어나다며 재능을 알아봐 준 학원이기도 했다. 티라노가 어릴 때부터 학습지나 학원 선생님들이 은근히 티라노 엄마인 날 무시하는 말투로 대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발달이 느린 티라노를 누군가 좋게 봐준 건 학교와 학원 통틀어 처음이었다. 이 학원에서만큼은 티라노는 더 이상 아싸도, 어딘가 이상하고 특이한 아이도 아니었다. 이 학원을 꾸준히 다니는 동안 수학실력이 많이 올라 티라노는 어느새 특목고/자사고 준비반이 되어 있었으니까.
중3 2학기, 고등관에서 시험대비를 맡았다. 중등관에서 고등관으로 올라가 새 고등관 선생님과 함께 두 달간 2학기고사를 대비했다. 고등관에서의 첫 시험이었다. 이전까지와 다르게 웬일인지 이번 수학시험은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출제되었다. 그런데 고등관으로 옮기니 오히려 중3 아이들 시험결과가 안 좋았다.
중등관에서는 최고난도 문제들과 어렵기로 소문난 학교들 기출을 엄청 풀리며 시험대비를 시켰었다. 그런데 고등관에 오니 기초부터 잡아야 한다며 학교 학습지를 수차례 반복해서 풀게 했다. 티라노 학교의 수학시험은 검은 라벨 수준 문제가 4개씩 출제된다. 그런데 4개를 전부 틀리면 80점을 넘기 어려워 검은 라벨 수준 대비는 필수다. 고등관이라 이 중학교 시험 패턴을 잘 모르셨나 싶었다.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한 명씩 그만두기 시작한 게 말이다.
이제 정말로 이 학원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
올게 와버렸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문제는 티라노가 아주 예민한 ADHD아이라는 데 있었다. 감각은 예민하지만 눈치는 부족한 아이. 그게 바로 ADHD라 예민한 사람의 특징이다. 감각이 예민해서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스트레스는 남들보다 몇 배로 많이 받는 반면 눈치는 부족해 적응은 어렵다. 예민하고 느린 이 아이 성향에 잘 맞는 학원을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아이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봐줄 학원이어야 했다. 3년 넘게 다닌 지금 학원처럼 말이다.
"학원 옮겨야 한다는 건 잘 알아. 그렇지만 혹시 옮겼는데 새 학원이 너무 힘들어서 수학마저 그만하고 싶어질까 봐 옮기기가 겁나."
잠들기 전 학원 옮기는 게 어떠냐는 내 제안에 티라노씨가 한 말이다. 놀랍게도 티라노씨도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건 아니었다.
"번아웃이 와서 2달만 쉬겠다고 말해놓으면 되지. 그렇게 보류해 놓고, 옮겼는데 도저히 적응 못하겠으면 원래 다니던 학원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누가 학원 옮긴다고 말하고 그만두냐! 너 가만 생각해 봐. 그동안 쉬겠다고 하고 안 나오는 애들 중 돌아온 애들 있어? 다 그렇게 옮기는 거야.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여리고 예민하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다 큰 예비 고1 아들을 달래며 진정시켜 놓은 참이었다.
동네에 친한 엄마 한 명이 없는 나였다. 정보를 얻으려면 남들보다 몇 배로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학교설명회도 다니고, 네이버 공부카페에서 검색도 많이 하며 정보를 모았다.
다행히 티라노가 "우리 학교에서 수학 잘하는 애들 A랑 B학원 많이 다니던데? D도 좀 꽤 있더라"라며 학교에서 들은 학원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티라노와 내가 모은 정보를 종합하여 이 동네에서 고등부 수학으로 유명하다는 A와 B, 그리고 C학원 세 곳의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티라노에게 남은 공부라고는 수학뿐이라 이것마저 망할까 봐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수행평가는커녕 모든 학교 공부도, 절친한 친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아이의 자존감 양대산맥은 게임과 수학이었다. 양팔이 잘려 남은 건 두 다리뿐. 그 한쪽 다리마저 내어줄 순 없었다. 수학을 내어주면 이 아이에겐 게임만 남으니까.
'영어학원 때처럼 망해선 절대 안 돼. 한번 망하지 두 번 망할 순 없어. 그땐 티라노 성향을 잘 몰랐지만 공부를 많이 한 지금은 달라. 해내야만 해.'
오로지 이 생각으로 머릿속이 한가득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수학학원 하나 옮기는 것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중단된 영어학원을 다시 다닐 소중한 기회를 충분한 고려 없이 보냈다가 허망하게 날린 전적이 있었다. 아이 성향파악을 못한 무지함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당시엔 예민은 둘째치고 티라노가 ADHD인 줄도 몰랐으니 말이다.
레벨테스트 순서도 정말 중요했다. 당시 2군데 예약한 레벨테스트의 두 번째 시험응시를 거부했었다. 그렇기에 가장 맞아 보이는 학원 시험부터 치르게 하는 게 필요했다. 그런데 학원 일정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학원과 상의하여 테스트를 잡다 보니 가장 보내고 싶은 학원 시험이 하필 세 번째였다. 영어 때처럼 한두 군데만 시험 보고 거부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티라노를 잘 설득해야 했다.
"티라노야. 이번엔 영어학원 때처럼 레벨테스트 힘들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면 안 돼. 너와 잘 맞고, 너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학원을 찾아야 되는 거야. 화목토엔 지금 학원, 월수금엔 시험 보러 가야 돼서 일주일 동안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
그랬더니 "응. 그래야지."란다. 티라노 본인도 수학학원 잘 찾고 싶긴 한가보다. 의지가 느껴진다. 휴 다행이다. 그렇게 레벨테스트 날짜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