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스페이스
세 살 된 강아지 몽이가 멍하니 창밖만 보는 게 불쌍해 보여 강아지 한 마리를 더 입양했다. 두 마리가 같이 있으면, 덜 심심하고 잘 놀겠지 싶어서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새로 온 아기 강아지 키키는 시도 때도 없이 몽이에게 놀자고 달려들었고, 몽이는 그런 키키가 귀찮아 몸서리치며 도망쳤다. 서로 친해지는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같은 공간에 두었다. 마찬가지였다. 이를 어쩌나 싶어 근처에 있는 훈련소를 찾아갔다. 두 강아지 성향이 너무 달라 그런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면 된다고 했다. 어린 키키가 배울 때까지 분리해 키우라고 했다. 강아지는 무조건 서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우리처럼 성격차이도 있고 자기 영역이 있다니 참 재밌구나 싶었다.
자기 영역은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 영미 문화에선 ‘퍼스널스페이스’라는 인간관계의 기본 매너를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운다.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스페이스버블’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커다란 비눗방울 안에 있는 거고, 그 공간은 자기만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서로에게서 필요한 물리적 거리이자 정서적 거리다. 가족이나 친구의 비눗방울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실례고,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다.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 역시 퍼스널스페이스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취업한 첫 직장에서 적지 않게 당황한 적이 있다. 선배들은 의례 첫인사로 부모님 직업, 내가 사는 동네는 물론 남자친구 유무까지 확인하곤 했다. 초면의 사람들이 나이나 학교 등을 묻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의 연애사까지 궁금해하는 건 조금 의외였다. 당황스러웠으나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입사동기와 사내연애를 했던 나는 3년 내내 인사팀은 물론 협력업체 사장님들 입방아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결별과 함께 나는 퇴사했다. 같이 사내연애를 시작했던 여자동기가 왜 그리 나를 붙들고 입단속을 시켰는지 그제야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도 이제 아이 둘 엄마다. 한국 사람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한국이 편하고 좋지만 여전히 힘든 건 가끔 만나는 퍼스널스페이스를 안 지키는 사람들이다. 교회에서 만난 한 자매는 몇 번의 나눔으로 조금 가까워졌다 싶을 때쯤 나에게 본인을 친언니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나에게 맡기기 시작했고, 아무 때나 불쑥 찾아왔다. 가끔 자기가 만든 반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어떤 것도 나의 의사를 묻지 않고 말이다. 나는 이런 게 친언니가 할 일인가 생각이 들었다. 친언니여도 거절하고 싶었다.
친하면 어디까지 허용되는 건지 고민한 적이 있다. 살면서 친해진 사이에서 상처받은 적이 꽤 있기 때문이다. 친하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참았는데, 상대의 요구는 더해졌고 더 이상 못 참겠어서 싫다고 하니,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며 못된 사람이 돼버렸다. 가깝고 친해서 누군가 손해 보고 참아야 한다면 안 가까워지고 싶지 않을까. 성격이 다르더라도 친해질 수 있는 안전장치가 퍼스널스페이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사람들과 친해질 수 없는 이유다.
몽이와 키키는 이제 각자 원하는 곳에서 지낸다. 그래도 산책은 같이 나간다. 대신 내가 목줄을 한 손에 한 마리씩 따로 잡고 양팔에 간격을 두고 걷는다. 녀석들도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산책을 즐긴다. 혹여라도 키키가 거리를 좁혀 너무 가까이 들어오면 몽이가 ‘컹!’하고 경고한다. 그러면 키키가 알아듣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녀석들을 보며, 나의 경고음은 뭐가 좋을까 고민해 봤다. 불쑥 내 영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싫어 몸서리치고 도망가던 나는, 이젠 ‘컹’하고 알려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