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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Feb 19. 2024

겨울이 건네는 위로

겨울을 싫어했다. 

본가에 살 때만 해도 겨울이 두려웠다.

엄마는 항상 난방비를 아낀다는 일념하에

보일러를 허락하지 않았다. 

보일러 버튼을 누르는 것은 엄마의 권한이었고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엄마, 추워~보일러 좀 틀어줘"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겨우 보일러가 돌아갔다.

한겨울에도 하루에 잠깐씩만 집에 온기가 

다녀갔고, 그마저도 오래된 창틀의 틈사이로

빠르게 소진되었다.

수면양말을 신고, 두꺼운 수면털바지와

몇 겹을 껴입고 지냈다. 겨울이 주는 무게는

무겁고 두터웠다. 

이런 이유로 겨울은 나의 피부 속에 부정의

기억을 쌓이게 했다.

나는 겨울을 싫어했고, 

두꺼운 옷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추위가 지긋지긋했다.


그래서일까, 결혼해서는 신축의 건축물에서만

살아왔다. 그것도 볕 잘 드는 남향으로.

30년 된 동향의 본가 아파트에서 경험했던

난방의 비효율을 절실히 경험했기에 결혼 후

주거의 선택권이 주어진 나는 본능적으로

따스함을 쫓았다.

확실히 신축 건축물들은 창문틀 사이가 견고했고

남향은 종일 따뜻한 햇빛이 가득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5년 차이지만, 

한 겨울에도 난방을 2시간만 틀어도 종일

포근하다. 

오래도록 함께 했던 수면의류들이 사라지고,

겨울의 두텁던 껍데기가 허물을 벗듯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신기한 변화가 찾아왔다.

나의 입에서 어느샌가부터

"겨울이 좋다"는 문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 바다가 좋다. 

하얀 눈과 깊은 바다가 만날 때면

겨울의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한없이 차갑고 

한없이 깊은 순결함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면 바깥은 더 고요해지고

말을 내뱉기보다 안에 쌓아둔다.

그렇게 가만히 눈이 내리는 소리,

눈이 바다에 쌓이는 소리를 듣는다.

겨울이다. 겨울이 좋다. _ 1.23.2024



그럼에도 겨울의 실질적인 추위,

피하지 못하는 차가움을 

적은 이웃님들의 글들을 볼 때면

여전히 동조의 댓글을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맞아요, 겨울은 정말 춥고,

추위는 몸을 움츠리게 만들죠."


따뜻해진 건 집안이 따뜻해진 거지

겨울 세상이 모두 따뜻해진 건

아니니까. 여전히 겨울 밖은 내게

춥고, 추위가 싫은 건 여전하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 겨울의 단점을 보완해 줄 치트키가

있다. 바로 샤브샤브, 전골요리이다.

예전에는 샤브샤브는 주로 외식할 때

즐겨 먹는 메뉴였다. 바닷가 마을에 살고부터

집밥을 즐겨 먹기 시작하면서, 샤브샤브가

집밥 메뉴로 등극했다.

집에서 해 먹을수록 전골요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이만한 요리가 없다는 것도.




준비물은 알배추, 청경채,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팽이버섯, 어묵, 떡국떡, 물만두,

라이스페이퍼, 스윗칠리소스, 복숭아 통조림이다.

시간이 부족할 때는 큰 웍에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전골 끓이듯 해 먹는다. 하지만 이는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이고,

다 조리되어 익혀지기에 물러질 수 있는 단점이 있다.

해서 우리는 캠핑용 구이바다를 애용한다.




1. 멸치, 새우, 다시다 육수를 미리 끓여둔걸 

구이바다에 붓는다.

2.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채소와 버섯, 오뎅, 떡국떡,

물만두를 차례대로 넣어준다. 미리 재료를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뒀기에 몇 번에 걸쳐 먹을양만큼

투여한다.

3. 색이 변하고 익기 시작한 아이들 먼저 건져 

라이스페이퍼에 쌈을 해 먹는다. 이때 칠리소스와

복숭아 통조림, 월남쌈 재료들

(파프리카, 오이, 당근, 옥수수 등등)을 가미해 주면 

별미가 된다.



4. 아이가 있으면 국물밥으로 해주면,

야채 버섯을 잘 안 먹는 아이에게도 골고루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5. 몇 번에 걸쳐 준비해 둔 재료들을 먹고 나면

걸쭉해진 국물에 미리 해동해 둔 칼국수면을 

넣는다. 또는 계란, 김가루, 밥과 함께 죽을

만들어줘도 정말 맛있다.

메인 요리 후에 먹는 후식들이 맛있는 순간이다.


고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샤부샤부 단골손님인 차돌박이가 빠져있다.

육식을 멀리하고자 마음먹고

샤브샤브에서 고기를 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심한 느낌이 있었지만

버섯을 종류별로 듬뿍 채워주었더니

버섯에서 고기맛이 나는 거다. 

무엇보다 고기의 기름기가 빠진

국물이 주는 깔끔한 따스함이

위속을 채워줄 때면 영혼까지

맑고 포근해진다.

이럴 때면 시간을 지배하고 있던 

겨울의 서늘함이 배 속에서 

샤브샤브와 함께 사르르

봄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위 속에서 계절의 향연이

펼쳐지는 순간이자,

소울푸드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이렇게 샤브샤브는 내게 소울푸드가 

되었다. 

다른 계절에서는 결코 이 향미와 감흥이

찾아들지 않는다.

오로지 피부와 마음에 차가운 기운이 어릴 때만

소울푸드의 면모가 발휘된다.


겨울은 나에게 냉정함을 비추는 동시에

따스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하루 동안 추위 속에서 차갑게 식은 

피부와 뱃속을 샤브샤브의 보드라운

포웅으로 채우고 나면 이 말이 절로 나온다.

"겨울이 좋다.

겨울이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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