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하 Feb 16. 2024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먹구름 낀 날이 있으면,

쨍쨍 볕이 뜨는 날도 있다.

땅이 꺼지도록 우울할 때가 있으면

하늘을 날도록 행복한때가 있다.

마냥 좋던 사람에게도 단점이

보일 수 있고, 나에게서도 좋은 점과

싫은 점이 명확하다.

이 양면성은 날씨, 기분,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도 마음속에

확고히 펼쳐질 때가 있다.

좋은 점을 생각하면 바로 당장 시작해보고 싶지만,

좋지 않은 점을 떠올릴 때면 또 하기 꺼려지게 된다.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지만 하기 싫은 것들이

내게는 많이 있다.

이 둘의 차이는 극소하지만 명확하다.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이 싫은 마음을

이긴 것이고,

하고 싶지만 하기 싫은 것은 싫은 마음이 싶은 마음을

이긴 것이다.

전자에는 스텐팬 길들이기(길들이기가 어렵고 번거롭지만

몸에 좋고 장기적 사용이 가능하다) ,

뜨개질로 목도리 뜨기(한 땀 한 땀 뜨기 귀찮지만 포근한

아날로그 감성이 좋다),

영랑호수 걸어서 한 바퀴 돌기(반바퀴 돌다가 힘들어서 포기했지만

체력을 길러서 꼭 다 돌아보고 싶다),

웨이트닝 10킬로에서 20킬로로 올려보기(지금은 10킬로로 맞춰서 하고 있는데 20킬로도 가뿐히 할 정도로 근력을 키우고 싶다) 등등이 있겠다.


후자에는 스카이 다이빙(스릴을 느껴보고 싶지만 고소공포증이 있어

비행기 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스쿠버 다이빙(바닷속 심해도 궁금하지만

깊은 바다가 두렵다),

11자 복근 만들기(11자 복근의 가벼움과 단단함을 느껴보고 싶지만

주 3회 40개 크런치가 제공하는

복부 근력만으로도 만족한다.

11자 복근 만들려면 도대체 몇 개를 해야 되지?!).

밀가루 음식 정말 끊기(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파스타나 빵 없는

세상을 살라고 하면 의미가 없다)

완전한 채식 하기(고기를 줄이고 있지만

가끔 치킨에 맥주가,

캠핑에서 먹는 바베큐가 그리운 날이 있다.

이런 즐거움은 의외로 삶에 큰 부분이다) 등등이 있겠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것' 중에서 스텐팬 길들이기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스텐팬은 길들이기가 어렵고 번거로워 사용하기싫었다. 이와 동시에 매년 코팅팬처럼 갈아줄 필요도 없고 거의 평생 사용가능하고, 건강에도 무해하고, 무엇보다 요리 맛이 다르다고 하니 사용해 보고 싶었다.

두 마음이 대립되기를 몇 년, 드디어 한 달 전에 스텐팬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고서 소비 횟수가 줄어든 대신

고품질 물건을 사고 있다. 스텐팬도 좋아하는 독일브랜드

에서 좋다는 높은 모델을 골랐다. 4인식구가 사용해야 하니

28cm다. 엄청 무겁다는 후기를 보았음에도 사용해 보니

엄청 무거웠다.

3킬로가 넘는 것 같다. 팬을 들 때마다 헬스 하는 기분이다.

대충 사용법을 찾아보니 중불에 5분 가열하고, 불 끄고 1분을 두라고 한다. 그대로 따라 했다가 팬이 홀라당 탔다.

다시 가열 3분, 예열 1분 이제는 타지 않았다.

다만 기름을 너무 많이 둘러서 계란 후라이가 아닌

계란 튀김이 되었다.

생선을 구우면 생선 껍질이 살과 이단 분리가 되었고,

핫케익을 구울 때면 바닥에 눌어붙었다.

요리는 달라붙어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문제는 요리하고 매번 설거지가 힘들다는 거다.

박박 문질러도 기름때와 탄 자국이 지워지질 않아

식초와 베이킹 소다를 넣고 팔팔 물을 끓였다.

그렇게 뜨거운 상태에서야 겨우 깨끗한 상태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할만했는데 이런 횟수가 쌓일수록

슬슬 '방출'하고픈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편도 이거 못쓰겠어, 코팅팬 사줘!라고

고백했다. 스텐팬과 함께한 지 3주 차였다.

스텐팬 길들이기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도 벽 쪽에 그을린 자국들을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정녕 이 하기 싫은 일을 해가며

스텐팬을 사용해야 하는 걸까?'

깊은 의구심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뇌했다.

그러다 마음속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또 솟아오르면서, 작은 희망을 던졌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그리고 작정하고 유튜브에 스텐팬 사용법 관련

영상을 찾아보았다. 역시 유튜브에는 없는 게 없다.

스텐팬 길들이기 선배님들이 나와 같은 실패와

고뇌를 겪은 후에 깨달은 꿀팁들을 대방출하고 있었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정독하고 메모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드디어 스텐팬이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텐팬은 표면이 거칠거칠하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를 코팅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기름을 쓸 때 없이 많이 붓는 대신에

코팅팬 하듯이 기름을 두르고 대신 스냅을

이용해 전체에 펴준다.

그리고 중불에서 3분간(이를 위해 타이머도 샀다)

가열을 하고, 1분간 꺼둔다.

1분 뒤에 다시 불을 켜고 요리를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

나의 노력을 어깨너머로 듣고 본 남편도

'이제 쓸만한 것 같네' 한마디 건넸다.

오늘 아침 스크램블을

하는데 처음으로 영롱한 또르르 계란이

춤추는 광경을 마주했다.

이때의 뭉클함이란...

근 한 달간의 고생이 사르르 녹아드는 감동이었다.




벽 쪽의 탄 자국이 그간의 고난과 역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이 자국들을

매번 지우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사용하고 키친타월로 한번 쓱 닦아주고

저녁에 한 번만 뜨거운 물에 씻어주고

며칠에 한 번씩만 물을 끓여 목욕시켜 주리라.

스텐팬도 며칠은 기다려주겠지.

반짝이지 않아도 길들여진 스텐팬이 좋다.

무거워도 안정감 있는 스텐팬이 좋다.

이제는 다음 '하기 싫지만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할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발선 위의 느긋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