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재밌다. 재밌어서 재밌는 것도 있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확확 변하는 다양성이 재밌다.
쓰기의 요정이라도 열 손가락에 붙어있는 날이면
머릿속에서 술술 단어들이 손끝으로 쏟아진다.
하얀 화면은 순수한 즐거움이 가득한
자유의 놀이터가 된다.
아무 제약도 없이 글자와 노는 기분이 들 때가
쓰는 행위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이때 나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의 희망과 절망은 뒤통수에
걸려있는 법이니까.
어깨는 가볍게 워딩과 함께 흔들거리고
배시시 웃고 있을 것 같은 뒤통수까지
그려보면 사뭇 유쾌해진다.
'그래, 이래서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거겠지.'
라는 되뇌임과 함께.
반면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날도 있다. 이런 조짐이 보이면
괜히 주변 핑계를 댄다.
상쾌한 공기가 더 필요해.라며 환기를 하거나.
머그컵의 커피 대신 찻잔에 캐모마일 티를 내려 마시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찻잔을 가져오거나.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라며 이른 아점을 챙겨 먹는다.
현실적 좌절은 이런 이차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어도
대부분 효력이 없음을 인식함에 있다.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아도 하얀 화면에
공백만 남겨질 때면, 폐 속에서 깊은 낙망의 숨이 세어 나온다.
'그래, 이제는 쓰는 생활을 떼려치울 때인가 보다. 이제 그... 만...'
마찬가지로 이때의 뒷모습도 그려본다.
쪼그라든 어깨와 축 늘어져있는 머리카락까지
모든 빛을 삼켜버려 깜깜한 그늘만 가득이다.
이럴 때면 누가 봐도 저 사람 실망하는 중이구나...
하고 알 수 있으리라.
남편은 종종 서재 문을 열고 쉬엄쉬엄 해. 한마디
쓱 던지고 간다.
그럼 나는 쓰기의 선생님들의 말에 수혈을 찾는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나탈리 골드버그 선생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대니 샤피로 선생님이 지은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를
열어본다.
"가장 아끼는 친구 중 하나는 짧고 나쁜 책을
쓰겠다고 되뇌면서 지난 소설을 시작했다.
(그 작품은 상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는
짧고 나쁜 책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근사한 전략이다. 누구라도
짧고 나쁜 책은 쓸 수 있으니까.
그렇지?" _<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중에서
분명 몇 해 전에 읽었던 글인데 또 새롭다.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고 표시까지
남겨져있는데 그사이 나는 망각했던 것이다.
다시 이 문장들이 절망의 순간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며칠 전 5살인 첫째가 엄마를 그려준단다.
그것도 엄마 아빠 결혼식 때 모습을.
아이는 꽤 어려운 도전이었는지
몇 번을 그리고 지우고 반복했다.
그러고 마침내 좌절의 말들을
뱉어내며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야기했다.
"완벽하게 그리고 싶어서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네가 그려준 그림이면
다 좋으니까." 아이는 우리의
웨딩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다시 웃을 수있었다.
우리의 뇌에는 '완벽'과 '성공'이라는
단어가 프로그래밍 돼있는 게 분명하다.
시작하는 일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고,
이 마음들은 나도 모르게 시작 앞의
허들이 되어 새로운 도약을 방해한다.
허들을 건너 뛸 때 혹여 걸려 넘어질까 봐.
남들이 보기에 넘어진 나의 모습이
비칠까 봐, 나를 비웃을까 봐....
스스로 질책하고, 시작도 하기 전에 낙망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성공을 바라는 것과 동시에
실패에 대한 걱정 또한 내재되기에.
이는 아마도 성공한 이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하게 비치고,
그 너머 그늘에 쓸쓸히 걸려있는 좌절한
이들을 위한 따스한 위로가 등한시
되었기 때문이리라.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배우게 되고
실패에 대한 대처법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으니까.
이런 실망들이 자연스러우리라.
해서 이제는 실패해도 괜찮은
짧고 나쁜 글을 쓰려 한다.
실패해도 충분한 짧고 나쁜 책을
쓰려 한다.
우리는 실패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우리는 실패해도 충분한 사람이니까.
오늘도 글을 쓴다.
짧고 나쁜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