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세드 May 03. 2024

울다가 웃으면

“야 내가 어제 너무 충격적인 일이 있었잖아!”

“뭔데 언니?”

“글쎄 길을 가다가 아들이 친구랑 가는 걸 봤어. 얼마나 반가워, 길에서 아들을 만났으니. 그런데 걔가 날 보더니 눈을 싹 피하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더라?”

“응? 정말? 이유가 뭐래?”

“사춘기 아이를 길에서 만나면 서로 모른 척하는 게 예의래. 그래서 나 상처받았잖아. 그러니 너도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

“…….”



아직 오지도 않은 아이의 사춘기가 두려웠었다. 그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아이에게 까임을 당해도 마음에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몇 가지 다짐을 했었다.



1. 길거리에서 만나면 남의 집 아이 보듯 한다. 아니 보지도 않는다. 스치듯 안녕~

2. 아이와 같이 걸을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다.

남인 듯 남이 아닌 남 같은 거리 유지하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달라진 아이의 모습에 두려움은 조금씩 커져만 갔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아니 목소리가 박히도록 하루에도 수백 번씩 불러대던 “엄마”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 나랑 놀아줘” 하는 소리는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돈이 필요할 때만 엄마 소리 한다던 선배맘들의 이야기가 성경 말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아.. 나도 곧 겪게 되는 일이고… 게다가 어느 날부터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는다. ’ 방문을 닫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며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춘기인지 아닌지 언제 알 수 있는 줄 알아?”

“아니~”

“아이 머리를 만져. 그럴 때 인상 찡그리면서 피하면 사춘기, 가만히 있으면 아직이야. 시우는 어때?”

“시우는 가만히 있는데…”

“그럼 아직 사춘기 아니야!!”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뭐든 처음인 나는 어떤 증상이 나타나야 사춘기인지 여전히 잘 몰랐다. 전처럼 엄마를 부르지 않는 것 빼고는 나랑 장난도 잘 치고 스킨십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머리를 만지는데 아이가 쓱 피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것은 사춘기 증상인데?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한다. 시우야~ 하고 부르면 즉각적으로 대답하던 아이는 어느 날부터 대답을 뒤로 미루기 시작한다. 열의 아홉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보다 두 박자 반 정도 늦어진 대답에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것은 내 입장이다) 짜증을 내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일주일에 한 번 책상을 치우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책상을 치우라고 할 때마다, 숙제를 해야 한다고 말을 할 때마다 아이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춘기라는 녀석이 아이의 머리에 가슴에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나도 저랬나?‘


아무리 지난날의 나의 모습을 돌아봐도 지금 내 아이가 내게 보이는 모습이 찾아지지도 기억나지도 않는다. 난 착한 아이였으니까. 엄마에게 한 번도 말대답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겉으론 그랬지만 속으로는 엄마, 그건 아니잖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러니 아이의 이런 반응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처음 마주한 모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초장에 버릇을 잡아야 하나 (이것이 답이 아닌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다.), 적당히 눈을 감고 넘어가줘야 하나… 공부냐 관계냐에서 관계를 택한 나였으니 이번 대처법에도 어느 정도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아이의 반응에 따라 나도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었으니 맘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아이가 아침에 하기로 한 책상 치우기와 숙제를 자꾸만 미루며 핸드폰 화면을 애인 얼굴 보듯 보고 있었다. 12시쯤 점심 먹으러 나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전에 끝내기로 했음에도 아이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을 아는지 시간은 째깍째깍 마치 내게 메롱메롱 약 오르지 하는 것처럼 가고 있었다. 참다못한 나는 결국 아이에게 화를 내고 말았고, 아이도 나의 반응에 화가 났는지 온몸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얼씨구 그러다 책상 부수겠는데?’

‘어라? 숙제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아이에게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말들이다. 이미 집안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그 중간에서 남편도 화가 났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 이럴 땐 당신도 가만있는 게 우릴 도와주는 거야.



드디어 숙제를 다 한 모양이다. 책을 덮는 소리가 아주 우렁차게 들려온다. 12시에 나가기로 한 세 식구는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각자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랑 사이가 틀어진 아이는 아빠 옆을 떠나지 않는다. 슬그머니 손을 잡더니 뭐라고 뭐라고 속닥속닥 거린다. 난 뒤를 쫓아가며 키만 다르지 똑같은 뒷모습을 한 두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징그럽게도 똑같이 생겼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고르는 그 사이, 아니 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사이에 아이의 짜증은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있었다.

“엄마 있잖아요..” 하며 말을 꺼내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내 눈은 분명히 하트가 뿅뿅하고 있었을 것이고, 두 귀는 토끼를 똑같이 닮아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농담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난 아이의 말에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던 거 같다.



아이의 감정에 따라 울다 웃다가 하는 내 감정. 울다가 웃으면 그.. 거기에 털이 난다고 했는데…. 난 오히려 아이의 그 천진함에 감사하게 된다. 눈치 보지 않음이 (봐야 할 땐 좀 봐줘라.) 감사하다.



학교에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생긴 일들도 미주알고주알 빼놓지 않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시키지 않아도 공부한다는 이야기도. 그러나 그것은 늘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함정이면 어떤가, 아이가 건강하게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먹고 또 먹는다. 살이 안 빠지는 이유다. 이렇게 먹어대니……



올해 중3이 된 아이. 사춘기야 아니야? 가 여전히 헷갈리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생각이 자라고 몸이 자라면서 계속 아이와 나는 부딪칠 것이고, 서로 양보할 것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날도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46년 간 나와도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울다 웃으면 감사가 커진다. 계속 울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다. 그렇게 웃다 보면 방금까지 날 옭아매던 슬픔과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도 그냥 날 스쳐가는 감정이란 걸 깨닫게 되니 그것도 감사하다. 내 마음의 근육은 울다 웃었다 하는 사이 단단해질 것이다. 몸의 근육도 운동하는 과정에서 근섬유에 생긴 작은 상처들이 쉼의 과정에서 아물면서 단단해지는 것이다. 울음은 근섬유에 생긴 작은 상처요 웃음은 단단해지기 위해 필요한 쉼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니 울자, 그리고 웃자.

작가의 이전글 아이에게 배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