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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드 Apr 19. 2023

“바보네. 치킨하고 화해해요, 이제.”

치킨에겐 죄가 없다.

“바보네. 라면하고 화해해요, 이제.”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중에서, 이도우



돈은 없고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기만 하던 시절.

힘들었던 한 시절에 내 맘을 언짢게 했던 추억들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일이든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일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생각만 해도 울렁증이 올라오는 그 추억이 생각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찌르며 다가온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의 주인공인 진솔은 라면에 얽힌 언짢은 기억으로 인해 한동안 라면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기억에 굳이 마주 서고 싶지 않았던 마음일 테지. 나도 하나 꺼내볼까.




대여섯 살의 일로 기억한다. 휴일이었고 가족은 모두 집에 모여있었다. 아빠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외출준비를 하신다. ’ 어디를 가시는 걸까?‘

아빠 혼자 휴일을 즐기나 보다 싶었지만 아빠는 내게 손을 내미셨다. ’같이 가는 건가?‘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 휴일에 미소가 걸리는 순간이었다. 예쁘게 머리 빗고 깨끗한 옷 골라 입고 아빠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버스를 탔을까? 아니면 걸어갔을까?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소만 기억이 난다. 닭을 튀겨서 파는 통닭집이었다.



지금이야 프라이드치킨 체인점이 동네마다 몇 개씩 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흔한 곳이 아니었다. 시장에서야 만날 수 있는, 아니면 엄마가 큰맘 먹고 튀겨줘야만 먹을 수 있던 음식이었다.  내 기억엔 그렇다.



통닭집에 들어가서 내가 만난 사람은 예쁜 아가씨였다. 아빠는 그 아가씨를 “고모”라고 소개했다.

“혜진아 고모야 인사해.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모였다.

’ 내게 이런 고모가 있었던가? 그런데 이 고모는 왜 제주도 사투리를 안 하지? 다른 고모들은 서울 말을 써도 살짝 제주사투리 억양이 섞여 있는데 왜 이 고모는 정말 그냥, 쌩 서울말을 쓰는 거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많은 질문들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내 앞에 노랗고 바삭하게 튀겨진 통닭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노르스름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통닭. 한입 베어 물면 바사삭 소리가 날 것 같고, 고소한 기름과 닭고기의 담백함이 내 혓바닥을 사로잡을 것만 같다. 그 옆에는  정육면체의 하얀 치킨무가 아슬아슬 탑을 이루며 접시에 놓여있었다. 입으로 쏙 가져가서 깨물면 새콤달콤한 맛이 날 것이다.



아빠와 그 ’ 고모‘가 무슨 말을 나눴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치킨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언니, 오빠랑 나눠먹지 않고 나 혼자 오롯이 이 치킨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꿈만 같았으니까.

열심히 먹고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왔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이 사건은 몇 년이 흐르고 나서 내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겨 놓았다.



고모가 아닌 여자와 만나기 위해 어린 딸이 필요했던 남자. 난 그 어린 딸이었을 뿐이란 깨달음이 오랜 시간 내 발목을 붙잡았다. 치킨의 ‘치’ 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그날 무엇을 먹었던가. 치킨을 튀긴 기름처럼 끈적했던 분위기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치킨을 뜯었던 내 입을 쥐어뜯고 싶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아빠의 목을 조르고도 싶었다. 그러고도 당신이 아빠야!!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치킨을 잘 먹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었는데.. 쉽게 먹을 수 없기에 더더욱 원하게 되는 그런 음식이었는데…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임경선 작가의 소설 “나의 남자”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인 지운과 카페 사장 성현의 불륜을 그린 소설이다. 성현은 이혼남이었고, 지운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성현에게 마음이 기울던 지운은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성현의 카페로 간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품은 마음으로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책을 읽다 덮었다.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미친… 탄식과 함께 뱉어낸 한마디 말… 미친….



‘당신도 이런 마음이었어?’

물어보고 싶지만 고인이 된 아빠가 대답할리 만무하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그리웠어? 아무것도 모르는 날 데리고 갈 만큼?’



치킨과 언제 화해했을까..

넌 죄가 없더라. 넌 그냥 음식일 뿐인데 내가 너무 오래 미워했지?

실은 그날 아무것도 모르고 뼈를 야무지게 발라먹던 나 자신이 싫었던 건데. 날 거기로 데리고 간 아빠가 싫었던 건데.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으니 널 원망했던 거 같아. 널 미워한다고 해서 날 욕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안 먹으면 되는 일이잖아.

저 치킨 싫어해요.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그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아빠가 내게 한 짓을 까발릴 필요도 없으니까.




오랜만에 가족과 둘러앉아 치킨을 먹는다. 다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날개를 야무지게 챙긴다. 다이어터들이 먹는다는 닭가슴살도 챙긴다. 이렇게 먹으면 살이 안 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잠시 떠올랐던 그날의 일은 고개를 저으며 날려 보낸다.

지금 중요한 건 지난 과거가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40년이 흐르고 나서 아무렇지 않게 치킨을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면 난 나를 조금 덜 미워하고 치킨을 더 자주 먹었을지 모른다. 상처 앞에서 필요한 것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보다는 미래의 어느 날에 평범한 날들을 보낼 거라 상상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목은  이도우 작가님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서 극 중 건이의 대사를 (“바보네. 라면하고 화해해요, 이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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