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인생이고자 한다
"넌 원래 알아서 잘하잖아"
무심하게 툭 던져진 친구의 말이 나의 양미간에 시니컬한 주름을 만들었다.
'넌 내 인생이 그렇게 쉬워 보이니?'
차마 꺼내놓지 못한 말을 입속에서 되뇌다 삼켜버렸다. 자주 듣는 말이니 일상처럼 넘겼으면 그만인데 그날따라 풀리지 않는 현실의 고민이 나를 누르고 있던 터라 다소 예민해 있었다.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이니 가볍게 툭 받으면 그만인 것을 속 좁게 받아 마음 한 구석에 넣어 두었다. 이미 집중력이 떨어져 버려 그냥저냥 지인들과의 수다 시간을 채운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나이 들며 각자의 삶의 영역이 달라지고 현실에서 오는 공통 관심사가 달라졌다는 걸 일찍 받아들였다. 공감하지 못할 나의 직장 얘기를 쏟는 게 무의미하다 느껴져 언젠가부터 힘든 고민의 무게를 대화의 주제 속으로 억지로 욱여넣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골골했던 저질체력으로 인해 삶에 제동이 걸리기도 했고 지속되는 스트레스로 멘탈이 나갈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극복의 주체는 나인데 징징거리기 싫었다. 살아보니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짧은 글귀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만능 표현인지 싶어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차피 지나갈 거라는 걸 아니까 좋은 일에 과하게 기뻐할 필요도 없고 슬프거나 힘든 일에 과하게 감정을 쏟아낼 필요가 없다 느껴져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섭섭한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고 현재의 나로 존재하기까지의 서사가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나의 지인들에게 나는 늘 알아서 잘하는 사람.. 고민을 얘기하면 해결책을 줄 것 같은 사람.. 결정에 있어 주저함이 없는 사람...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사람이다. 굳이 나의 고민의 무게까지 얹지 않아도 이 세상에 힘든 사람들은 너무 많고 각자의 고민만으로도 버겁다. 결국 내가 해결할 고민이니 얘기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어 말을 아꼈던 노력의 결과가 남들 눈에는 쉬운 인생처럼 비칠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표현되지 않은 말들이 오랜 시간 쌓이면서 '원래 알아서 잘하는 사람' 안에 나의 모든 서사가 너무 쉽게 함축된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만으로 비추어지는 데는 나약함과 힘듦을 굳이 드러내지 않은 나의 탓도 있다.
알면서도 며칠간 마음 한 구석에 속 좁게 받아 챙겨 넣은 친구의 말을 자꾸 꺼내 되새김질했다. 언니에게 통화를 하며 투덜거렸다. 주인의 성격을 닮은 심플하고 화끈한 대답이 돌아왔다.
"야, 너 쉬운 인생 맞잖아. 서울에 집 있겠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겠다. 스트레스 주는 시댁이 있어 뭐가 있어. 별 것도 아닌 걸 뭘 담아둬?"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니는 항상 나의 고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정말 그런 건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잘 맞는다. 자매들의 성향이나 성격이 나와 달라 다행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나와 너무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지켜보는 건 나에게는 너무 피곤한 일이다. 뭔가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매번 확인받는 기분이랄까?
모든 인간은 각자의 고민과 고통의 무게를 달고 살아간다. 문을 닫다 문틈에 끼어버린 나의 손가락의 고통이 누군가의 오랜 암 투병보다 나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주의 중심은 나’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동일한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니 말로 표현되지 않은 나의 서사까지 상대방이 헤아려 주길 원하는 나의 마음이 어쩌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지도....
그냥 나는 앞으로도 남들 보기에 쉬운 인생이고자 한다. 구구절절... 힘들었던 과거사와 현재를 화두로 올려 미련스럽게 곱씹은들 순간의 위안은 받겠지만 달라질게 무엇이 있을까?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풀어내는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과 덜 드러내는 사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내가 좋아하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다.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나만 그런 것처럼 의미 부여하지 않는 쿨함을 유지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인생 진리를 마음에 담으려고 한다. 그렇게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고단함을 별것 아닌 듯 툭 튕겨내련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