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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릿한 달팽이 Dec 22. 2020

거미가 사라졌다.

(11월 이야기)


 달쯤 전이었다. 첫째 아이 방 앞 베란다 창밖 천장에서 꽤 큰 거미를 발견했다. 꼭대기 층이라 베란다 밖에도 지붕 같은 천장이 있는데 여기에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은 것이다. 겁이 많은 아이는 거미 좀 죽여달라고, 알 까고 새끼 거미들이 방으로 들어오면 어떡하냐며 질색을 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새끼 거미들이 방충망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올 일은 없어 보였지만 집에 거미줄이 있다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관리 안 되는 집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콤플렉스였을 지도.) 거미가 해충 아니고 (오히려 벌레를 잡아먹고) 실내에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나 싶었다. '넌 왜 하필 여기다 집을 지었니. 조금 더 올라가면 옥상도 있는데.' 하그냥 놔두기로 했다. 거미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냐 싶기도 했고.


그렇게 매일 창문 열 때마다 거미를 올려다보던 어느 날. 방충망에 1cm쯤 되는 작은 거미가 보였다. 그것도 방충망 안쪽에.


심란해졌다. 이게 저 녀석 새끼인가, 거미줄에 걸려있는 저 갈색 덩어리가 아이 말대로 알 주머니인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해봐도 긴가민가..) 괜히 불쌍하다고 놔뒀다가 정말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거 아닌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거미집도 더 튼튼하게 완성되는 느낌이 드는 거다. 아래 에어컨 실외기까지 거미줄이 이어져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외기까지는 좀 아니지 않나? 너도 눈치껏 적당히 해야 하지 않겠니?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실외기에 연결된 거미줄을 끊었다. 거미집이 바람에 흔들렸다. 거미도 움찔했다.



다음날 살펴보니 실외기에 다시 거미줄 하나가 반짝이는 거다. '어쭈, 이 녀석 봐라?!' 실외기에 붙어있는 거미줄을 또 끊었다. 며칠 동안 서너 번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누가 이기나 보자 싶기도 고 '제법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어느 날.


엇. 거미가 사라졌다! 옹색하게 남은 납작한 거미줄 몇 가닥만 보이고 위세 등등했던 거미가 안 보였다. 어디 간 거지? 바람에 떨어졌나? 주변을 둘러봐도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미줄을 끊어놓은 내가 당황스러워하는 이 상황도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놔둘걸. 내버려 뒀으면 그냥 날아갔으면 이렇게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내버려 뒀으면 안 날아갔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작년 봄 미국에서 살 때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서늘한 기억.


가족들과 외출하는 중이었다. 마주친 적도 없는 맞은편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손가락으로 집 위쪽을 가리키며 저것 좀 보라고. 저렇게 지붕 끝이 떨어져서 구멍이 있으면 새나 다람쥐가 둥지를 틀 수 있으니 고쳐야 한다는 거다. 헉. 미국에선 별 걸 다 신경 써야 하는구나.




매니저한테 얘기해야겠다 하고 하루 이틀이 지났다. 저 지붕 끝이 떨어진 자리가 안방과 아이들 방 사이에 있는 복도였는데 언제부턴가 푸드덕푸드덕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거다. 헉. 정말 뭐가 들어왔네! 설마 이 얇은 합판 벽을 뚫고 집 안까지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영국에 나가 있는 집주인을 대신해 집을 관리해 주고 있는 부동산 매니저한테 연락을 했다. 알았다며 수리하는 사람을 보내겠단다.


미국에서는 이런 수리가 하루 이틀 만에 되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야 사람이 오는데... 문제는 그 사이 벽 안에서 짹짹거리는 새끼 새들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거다. 허어억. 그 새 알을 품고 새끼가 나오다니. 새끼 새들이 짹짹거리다가 어미 새인지 아비 새 인지가 푸드덕거리며 들어오면 새끼 새들은 먹이를 먹었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알고 보니 버지니아 4,5월은 새들이 짝짓기 하는 시기라 이런 일이 흔하단다.)




드디어 수리하는 사람 둘이 왔다.


새 둥지는 그냥 땅바닥에 놓나? 그럼 안 될 텐데. 어떡하지? 수리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구멍 안에 새 둥지가 있다고 얘기했다.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더니 구멍이 작은 데다 둥지가 깊이 있어서 꺼낼 수가 없단다. 그냥 막아야 한단다. 허어 어 억.


새끼들이 있는 구멍을 막아버린다고? 생각지도 못 한 상황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말릴 수도 없었다. 내 집도 아닌 데다 수리비도 집주인이 내는 거니까.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한 사람이 수리를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은 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이 있냐고, 자기는 애가 셋인데 큰 애가 16살이고 막내가 세 살이란다. 남의 새끼들 지금 죽게 생겼는데 푸근하게 생긴 이 아저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기 새끼 얘기를 하고 있 엽기적인 상황이라니. 아기새들 생각에 심란했지만 얼떨결에  맞장구치고 있는 나는 또 어떻고.



그 와중에 지붕은 깔끔하게 수리됐다.



정말 끔찍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서있는데 밖에 나갔다 돌아온 어미, 아비 새가 집에 들어가질 못 하고 왔다 갔다 날아다니는 거다. 집 밖에서 그걸 보는 것도 끔찍했는데 그보다 더한 건 3층만 올라가면 들리는 새끼 새들 소리였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미칠 노릇이었다. 당시 동생이 조카들과 한국에서 잠시 놀러 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아이들한테는 대놓고 말도 못 하고 동생이랑 둘이 눈만 마주치면 아주 죽을 맛...


튜터한테 얘기하니 그러면 안 된다 야생동물 구조센터 연락처를 찾아 알려줬다. 그런데 전화할 수가 없었다. 이미 구멍을 막아버린 상태에서 세입자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구멍을 뜯어내고 어찌어찌해서 다시 구멍을 막는 비용 수백 불을 내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을까. 돈 앞에선 양심도 쪼그라들었다.


처음부터 매니저한테 얘기하지 말 걸, 좀 더 알아보고 그냥 놔둘걸. 몇 주만 지나고 새끼 새들이 자라면 전부 둥지를 떠나고 텅 빌 것을. 그걸 몰랐다.


새끼 새들은 거의 일주일 가까이 계속 짹짹거렸고 조금씩 소리가 잦아들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대결하듯이 실외기 거미줄을 끊었던 것이 이제 와 후회된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이렇게 서늘한 느낌은 없었을 텐데.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새 둥지와 거미를 만나게 될까. 새 둥지 사건을 겪고 거미 사건도 겪었으니 이제 비슷한 실수는 안 하려나? 모르겠다. 예상치 못 한 일이 닥쳤을 때 여유 있되 안일하지는 않은 혜안이 생기면 좋겠다. 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갑작스레 닥치는 세상 일에 매번 당황하는 나는 아마 평생 실수하면서 평생 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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