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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Mar 29. 2022

아빠의 수지 접합 수술과 코로나 확진

이 세상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밀접접촉을 거듭해도 나는 걸리지 않는다며 내가 바로 슈퍼 항체를 가지고 있다느니

미접종 자연 항체도 이만큼 강력하다느니 기고만장한 소리를 하더니.

코로나는 예외없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어느때와 다르지 않게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 저녁 7시경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일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어떻게 됐는데 확진이라 수술을 안해준다나봐. 이걸 어쩐대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사실 나도 어찌해야할 지 감은 잡히지 않았다.

우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빨리 끝내고 어서 뭐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엄마도 아빠에게서 간단한 내용을 전달받았을 뿐 딱히 아는 건 없다고 했다.

얼마나 다친건지 언제 다친건지 어쩌다 다친건지. 그냥 아빠는 간단하게만 말했다고 했다.

하던 일이 오늘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팀장은 그냥 내일 하라고 했다.


"엘리님 아까 뭐 어머니랑 통화하시던데 아버지가 수술하셨어요?"

굳이 회사에 구구절절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사정을 설명하게됐다.

"아... 그게... 아버지가 확진되셨대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확진이라 병원에서 수술을 안해준다네요"

"응?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너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들어가봐"


무덤덤한척 했지만 사실 난 괜찮지 않았다.

환갑하고도 몇년이 지난 아빠다.

평생을 기계를 다루는 양반이라 이미 손은 성하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눈깜짝할 새에 잘못될 수도 있는 지라 보험도 들기가 쉽지 않아

회사에서 부모님 실손 보험을 늘 별도로 들고 있었다. 


올해는 무슨 마가 꼈나 뭐 자꾸 나든 차든 가족이든 아픈 일만 생기는지 자꾸만 속이 상해서

푸르른 빛으로 가득한 판교의 하늘을 바라보며 찌질하게 질질짜댔다.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알라뿡~ 퇴근했어요?"

너무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 아빠 목소리에 괜스리 속이 더 상해서는 큰 소리를 냈다.

"아니! 왜 다치고 그래!!! 내가 조심하라구 했잖아 진짜 속상해!!! 얼마나 다쳤어? 괜찮아?"

수술은 다행히 끝났고 코로나 확진자라고 혼자 특실에 있다고 훠훠 웃었다.

확진자라고 회진이 오지도 않고 아무런 설명도 없다며 배가 고프다했다.

"괜찮어~ 수술 다 했어 별거 아니야~"


어젠가 그저껜가 뉴스에서 어떤 할머니가 확진자라 접합수술을 받지 못하고 여러 군데의 병원을 떠돌아 다니시다 겨우 수술을 받으셨다했는데 그게 고작 며칠사이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세상에 뭐 별 이런 일이 있나 싶어 실소마저 새어나왔다.


어찌되었건 수술이 되었다 하니 한번 마음을 놓고, PCR도 받으며 정신없던 그날의 밤은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는 그 병원에서 후속 조치를 받지 못하고 퇴원조치되어 집으로 오셨다.

병원에서는 계속 치료를 하고 싶었으나

병원이 위치한 관할 보건소에서 방역 수칙을 이유로 아빠를 퇴원조치하라 했단다.

어이가 없었지만 병원 입장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니 일개 우리같은 확진자1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안그래도 접합 수술이 필요한 응급 상황에 수술을 받지 못할 뻔한 억울한 이 상황에 화가 나는데

거기에 후속 조치는 받을 수 없는 이 상황도 어이가 없는데

한 번더 황당한 것은 "코로나"에 대한 조치였다.


무튼간에 확진자 신분이 된 아빠에 대해 어떠한 가이드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자기들은 알렸다 했고

관할 보건소인 서초구 보건소에서는 요새 시간이 걸리니 기다리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보건소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 보건소에서는 또 데이터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패시브를 장착한 여러명의 공무원을 거쳐도 뚜렷한 해결책이나 가이드는 전무했다.

물론 속출하는 확진자 속에 업무가 과부하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그건 남얘기일 때나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내 문제라면 그렇게 너그럽게 정부의 조치에 순순하게 기다리기 힘들다.

아니나 다를까 결론적으로 아빠는 공식적인 확진자가 아니었다.

나는 아빠에게 바로 별도의 PCR을 받으라고 했다.

PCR이 음성이면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고, 양성이면 코로나에 대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테니 일단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집앞의 선별진료소에서 PCR을 받은 이후에야 아빠는 공식적인 "확진자"의 신분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40도를 넘나드는 인생 최고의 발열을 경험했고

신속항원검사를 통해 양성판정을 받았다.

엄마도 PCR에서 빼박 양성 판정을 받았고

결국 우리 가족은 전원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최소한 집 안에서는 추가 감염에 대한 걱정 없는 평등한 격리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수지접합수술을 받은 아빠는 다행스럽게도 코로나에 대해서는 무증상에 가까워서

도리어 엄마와 나를 케어해야하는 입장이 되었고

엄마는 아빠의 수술자국을 절대 볼 수 없다기에 내가 아빠의 드레싱을 책임지는 간호사가 되었다.


아빠가 수술받은 병원에서 후속 조치에 대한 전화 내지 가이드라도 줬으면 좋으련만

그런건 없었다.

119에 전화하면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친절한 119에서도 수술한 병원이 가장 잘 안다며 병원으로 전화하라고 했다.

이곳 저곳 후속 조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열심히 알아봤지만

사실상 없었다.

조금 더 늦게 확진 판정을 받은 엄마에 의지하여 생리식염수와 거즈, 포비돈 스왑을 약국에서 사서

적당한 센스로 약식 드레싱을 했다.


"이야! 전문가네 전문가! 간호사보다 낫다!"

며 해맑게 붕대 감은 손을 연신 흔드는 아빠를 보면 실소가 나왔다.


잠시나마 미국에서 공부하며 아주 비싼 보험을 내며 병원을 가던 나는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아 몇개월동안 백신 패스아래 자유를 포기하고 살았지만

그건 나의 선택이니 하는 수 없이 책임질만 했다.


손가락이 기계에 눌려 뼈가 산산조각 나 수지 접합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아빠는 확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러 병원을 전전한 후 다행스럽게 겨우 수술은 받게 되었지만 

후속 조치에 합리적인 조치는 경험하기 힘들었다.

세상에는 다행스럽지 않을 위급한 일도 분명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빠가 수술받을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아 버렸다면

코로나가 무증상이 아니라 중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면

난 이렇게 태연하게 아빠의 코로나 후기를 적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빌려 쓰는 것도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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