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삼천배를 하는 이유
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살면서 이런 말을 참 많이 한다.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나를 알아가는 중일까?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평생 스스로를 마주하고 알아가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죽기전까지도 본인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몸뚱어리와 정신머리의 주인으로 몇십 년을 지내왔는데, 아직도 나 하나 제대로 알아가기가 쉽지 않은 걸 보면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인간이란게 타인에게는 참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으면서, 정작 나한테는 끝도없이 무심한 것 같다.
얼마 전, 예전 회사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마음 컨트롤 종교에 대한 이야기. 유의미한 시간이었고 건강한 대화였기에 기억이 생생할 때 바로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다.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같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과 교리를 전파하는 수단, 디테일의 차이가 다를 뿐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 종교는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다.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며 떠오르는 생각과 잡념을 가라앉히고 반복되는 고통을 잠재우다 보면 어느새 본인의 감정을 더 잘 컨트롤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웨이트 운동에서도 사점을 찍어야 더 높은 무게로 나아갈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가짐 역시 고통, 수련, 인내의 과정을 겪어야 한 걸음 더 걸어갈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너무 힘들었던 순간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다'라는 말이다. 그 말의 핵심을 보면, 힘들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힘듦을 온전히 마주하고 이겨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수련하더라도 인간은 한낱 중생이기에 잡념을 완벽하게 떨쳐낼 순 없다. 하지만 뼈를 깎고, 눈물이 나는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훗날 다시 생겨나는 잡념에 똑같이 휘청일 수밖에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힘든 순간은 반복해서 찾아온다. 그러니 잡념을 버티고 빠르게 잠재우는 연습, 나의 내면 속 본질에 집중하는 법을 수련해야 더 빨리 일어서고 회복할 수 있다.
불교를 예를 들면 '삼천배, 백팔배'라는 행위가 있다. 이는 잡념을 물리치는 수련의 과정이다. 몸이 힘들면 자연스레 무의미한 잡념들이 덜어지고, 고통이 극에 달하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날라가 버리는 것이다.
생각이 많을 때, 미친 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생각이 많을 때면 늘 달리기를 찾곤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리고 나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엄청난 시간 동안 반복되는 수련을 하는 스님도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결핍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잡념을 없애고 결국엔 초월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을 거치는 것이다.
종교를 자신을 마주하고 수련하는 과정으로 삼지 않고 단순히 특정 대상에게 의지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은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교리라는 것이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본질에 집중하지는 않고 일방향적인 믿음, 의지하는 존재로만 생각한다. 종교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특정 대상'을 믿어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함께함으로써 다 같이 수련하며 나아가자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 더 잘 알게 된다면 종교는 필요 없어지며, 각자가 본인 스스로를 믿고 지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중생이다. 힘든 일을 겪는 과정에서 이러한 수련은 고통스럽고 피하고만 싶다. 하지만 피하기만 한다면 힘든 상황은 반복되고, 결국엔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종교를 찾게 된다. 그렇게는 힘든 상황이 반복되는 게 바뀌지 않음에도 말이다.
생각이 많다면 그 생각의 끝에 부딪혀보자. 고통이 극에 달하고 나면 그 때부터 확실히 편해지는 순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