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여행의 시작

by 류완


군산을 처음 여행했을 때는 관광객이 많지 않았습니다. 적산가옥과 일본식 건물들이 군데군데 보였고 거리는 지방의 여느 중소도시들처럼 한산했습니다. 지금은 군산 하면 떠오르는 유명 음식점들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군산이 자랑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정보가 sns로 널리 퍼지기 전이었습니다. 전북지역을 여행하며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밟아 가다 보니 뜻하지 않게 닿은 곳이 군산이었습니다.


꼼꼼하게 돌아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항구가 있으니 해산물이나 먹고 옛 정서가 남아있다는 동네 분위기 정도 살피려 방문했는데 길을 잃어 의도치 않게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지금처럼 지도 애플리케이션이 있던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골목이 어딘지, 다음 골목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는 걸어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걸었고 초여름 군산의 구 시내는 멋진 여행지라기보다는 답답한 미로처럼 여겨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다녀온 그곳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타짜'의 촬영지였다는 사실을 몇 해가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걷는 즐거움이라도 알았다면 그때의 고생이 조금은 더 가볍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걷는 내내 저 골목을 돌면 내가 기대했던 목적지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함으로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습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들었고 두 다리를 잡아끌기도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은 항상 의도치 않은 변수가 생깁니다. 날씨, 시간, 음식, 공간, 그리고 사람까지 예측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여행을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여행은 망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거나 변수를 즐기는 경우입니다.


군산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수를 즐겼던 여행이었습니다.



DSC_5189.JPG 2008년 내부 수리 중이었던 히로쓰 가옥




종종 경험하지만 문제 해결은 내 욕심을 버릴 때 찾아옵니다.


군산의 옛 시내가 보이는 언덕 위 작은 공원으로 올랐습니다. 대충 기대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엉덩이의 절반 정도만 기대어 앉았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니 편안한 벤치가 근처에 있었음에도 제대로 앉는다는 것이 사치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휴식은 여행의 모든 것을 바꾸어준 소중한 터닝포인트였습니다.


나지막한 군산 구 시내의 건물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 중에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딘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무능력한 지리적 감각과 낮은 레벨의 체력이 원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조각난 햇살이 살짝 따갑게 느껴졌지만 금세 불어오는 실바람이 불안한 마음을 날려주었습니다. 간간히 떠다니는 조각구름에 햇살이 가려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울한 회색빛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내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자 군산의 나지막한 건물들은 저마다의 색과 모양을 드러내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양이 몇 번을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동안 내 생각도 천천히 바뀌어 갔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어쩌면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군산에 왔으니 나는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계획해 둔 여행의 계획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의 여행은 보너스 같은 것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발걸음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목적지를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내 발이 닿는 모든 곳을 목적지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골목이 다음 목적지가 되었습니다.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천천히 주변을 살폈습니다. 낡은 처마가 살짝 내려앉은 건물이 보였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여러 장의 기와와 유리창 몇 군데가 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관 유리문 안으로 비치는 하얀색 운동화 실루엣이 누군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선은 골목의 끝이 아닌 좌우를 향했습니다. 발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오래된 건물들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골목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습니다.



DSC_5188.JPG 당시 군산 거리에서 만난 오래된 가옥



사거리에 들어서면 그 순간 눈에 띄는 건물을 바라보며 다음 코스를 정했습니다. 골목 끝에 닿을 때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을 부여잡습니다. 뒤돌아보고 싶을 때마다 다음 골목의 기대감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배수관조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외벽에 쌓아 올린 벽돌의 빛바랜 색감도 스쳐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돌담 위에서 뛰어내리는 노란 털을 지닌 고양이 한 마리는 전설의 동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어느새 잔뜩 흐려진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뿌릴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맑은 하늘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기상변화 만으로는 군산을 걷는 기대감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햇살이 비추면 비추는 대로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마음을 따라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때론 목표가 행복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소중한 공간을 걷고 있었지만 그곳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치 커다란 계획 앞에서 인생의 한 조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쉽게 알아채지 못합니다. 지금 이 상황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생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정답도 없습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는 모두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살아온 시간과 공간이 다른데 같은 해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변화무쌍하고 각자가 느끼는 속도와 크기도 모두 다릅니다. 1 더하기 1은 2가 되어야 하지만 항상 1.5 즈음에서 2를 채우지 못하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제는 그 부족함이 나에게 힘이 된다고 느껴지다가도 채우지 못하는 불편함에 끝도 없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나온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이 시간이 지나면 씁쓸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고 너무나 아팠던 시간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누적된 경험은 과거의 기억을 변형시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던 과거마저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리운 옛날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군산이 그런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서 걸었는데 여전히 내 손에 하나가 남아 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아팠던 우리의 옛이야기가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내내 수탈과 아픔의 역사를 따라 걸었지만 나는 생각의 변화를 체험하며 예상치 못했던 작은 행복을 얻었습니다. 변화를 깨닫는 순간 여행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방향도 조금씩 그렇게 변해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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