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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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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의 글 Jun 24. 2023

바람피우지 않을 단단한 마음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십 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면, 미혼인 지인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오랫동안 만나면서 권태기는 없었느냐, 중간에 헤어진 적은 없느냐, 조금 심도 깊은 대화가 이어지는 날에는 다른 이성에게 설렌 적은 없었느냐는 물음도 나온다. 표면적인 질문은 달라도 밑바닥에는 묻는 이들의 같은 고민이 담겨 있다. 자신이 정말 한 눈 팔지 않고 한 사람과 평생 알콩달콩 살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을 잘하고 있는 기혼자에게서 나오는 가장 흔하지만 현실적인 대답은 "다른 이성에게 설렐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결혼 생활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쉽게 참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 생활 자체가 만족스러워야 한다."  정도가 아닐까.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한 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주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사라 폴리 감독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이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는 옆 집에 이사 온 남자에게 끌림을 느끼는 여자 주인공 마고가 등장한다. 문제는 이 여성이 유부녀라는 것. 마고와 남편 루는 격정적인 사랑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 친구 같은 부부다. 하지만 아내 마고는 결국 남편 루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고는 행복했을까. 감독은 그녀와 이웃집 남자의 격정적인 사랑 역시 권태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빠르게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카메라는 거실을 빙글빙글 돈다. 카메라가 집안의 기둥을 지날 때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달라지는데, 침대 위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던 둘은 소파에 앉아 서로의 존재를 무심히 여기며 티브이를 보는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뜨거웠던 두 사람도 권태에 이르러 이별을 한다.






감독은 새것도 결국 헌 것이 되며, 헌 것도 원래는 새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상기시켜 준다. 이 영화를 상징하는 배경음악으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꼽을 수 있는데, 바람을 피우는 두 남녀가 놀이기구를 타는 짜릿한 장면에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죽였다는 노래가 너무도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우리에겐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 스타>의 오프닝 음악으로 익숙한 곡이다.) 그리고 놀이기구가 끝났을 때, 음악도 끝나면서 적막이 흐른다.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듯, 마고는 적막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감독은 자신의 메시지를 수영장 샤워실 씬에서 직접적으로 말한다. 화면은 샤워실에서 할머니들과 마고 친구들의 나체를 비교하듯 보여준다. 그리고 할머니의 입을 빌려 감독은 말한다. 새것도 헌 게 된다고.


"새것도 헌 게 된단다."

"맞아요. 새것도 바래요. 헌 것도 원래 새 거였죠."



https://youtu.be/W8r-tXRLazs



이 영화가 인상적인 이유는 마고가 바람을 피우는 마음에 있다. 새것을 찾는 인간의 마음에는 어떤 헛헛함이 깔려 있다. 마고는 전 남편 루와 헤어지기 전,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되는지 영문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요.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태…"


마고의 말에는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공허가 담겨 있다. 공허는 말 그대로 비어있는 무언가일 텐데, 그것은 생의 밑그림에 자리하고 있다. 생의 밑그림에는 채울 수 없는 여백이 있고, 여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인간은 빈자리를 채우려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고통을 겪는다. 답이 없음을 어렴풋 알면서도, 어떤 이유로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자들은 이를 인간 실존의 문제라고 한다.


물론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여러 관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뇌과학의 관점에서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진화론의 관점에서 더 많은 번식과 생존을 위해 진화했다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혹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금기와 억압이 만든 사회적 욕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철학의 관점에서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감독은 마고의 감정을 원초적인 공허를 어찌하지 못하는 상태로 이야기하고 있다.


권태는 익숙함을 바탕으로 근원적인 공허를 더욱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공허는 외롭다는 감각을 증폭시키는데, 그럴 때 새로움이 주는 자극은 우리를 구원할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  사람을 만나면  헛헛함이 채워지리라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내가 완전해지리라마고는 생의 여백을 새로운 남자가 주는 자극적인 사랑으로 채우려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사랑은 그만한 힘이 없다자극에 기댄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의 끝에 마고는 전 남편 루를 찾아온다. 그리고 친하게 지냈던 전 남편의 여동생을 만난다. 루의 여동생은 마고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인생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우고 살 순 없어."


감독은 우리 인생의 빈틈을 메우려 하기 보단,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메우려는 무모한 행동이 삶을 망가뜨리곤 하니까. 그러니 타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원초적인 공허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은 온전히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안의 헛헛함을 타인의 사랑으로 메우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권태를 감당할 힘이 있어야 한다. 권태는 공허를 더욱 크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람피우지 않을 단단한 마음은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힘에서 나온다.  


1994년 그룹 N.EX.T의 신해철이 작곡한 <불멸에 관하여>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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